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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문학 > 청소년 소설
· ISBN : 9788997870899
· 쪽수 : 200쪽
· 출판일 : 2025-02-25
책 소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아버지는 수리 불가능 판정을 받았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고, 입실카드가 작동하지 않게 된 지 딱 일주일만이었다. 내 생일을 위해 준비되었던 케이크는 냉장고 안에서 3일 동안 기다려야 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장례식장 한쪽 구석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살았다.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해 우리는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손님이 오면 인사를 하고, 적당한 말을 주고받고, 서로 기도하는 자세로 머리를 숙였다. 대화가 매번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건 마크의 퀘스트만도 못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건 삼시 세끼 육개장과 편육뿐이었다, 편육은 족발보다도 더 아버지의 피부와 비슷했다. 어쩌면 어머니가 여전히 족발을 좋아할 수 있는 이유는 편육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물과 커피, 맨밥만 먹었다.
어머니는 장례식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은 없다는 듯 아무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나무위키」 편집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거기 올라오는 글을 직접 쓰거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하다 보면, 세상 온갖 것에 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은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이래 봬도 「나무위키」는 “여러분이 가꾸어 나가는 지식의 나무”이고 대한민국 웹사이트 트래픽에서 당당히 10위 안에 랭크되는 곳이다.
아버지는 매장되었다. 장례식 마지막 날, 나와 어머니는 리무진을 타고 시골의 야트막한 산으로 향했다. 함께 밤을 새운 낯선 얼굴들이 따로 버스를 타고 따라왔다. 그들은 아버지의 친구 혹은 친척들이라고 했다. 리무진에서 내린 다음, 우리는 장난감 병정들처럼 짧은 행진을 했다. 나는 하얀 장갑을 끼고 아버지의 사진과 한자가 쓰인 작은 나무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들어 걸었고, 아버지가 담긴 관을 든 남자들이 내 뒤를 따랐다. 올라가 보니 사람 열 명은 쌓을 수 있을 만한 구덩이가 이미 파여 있었다. 사진을 내려 놓은 다음부터는 내가 할 일이 없었다. 어른들이 천을 붙잡고 관을 구덩이 아래로 내려 보냈고, 삽으로 흙을 떠서 덮었다. 늙은 남자들이 그 뒤를 맡았는데, 그들은 흙을 덮고 네모나게 잘린 잔디들을 깔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었다. 그 작업은 두 시간 넘게 아무 말 없이 진행되었다. 나는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게 꼭 케이크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러 가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버지의 봉긋한 무덤은 11층짜리 케이크처럼 중간중간 누런 잔디들의 층이 삐져나온 흙더미가 되어 있었다. 늙은 남자들은 2주 정도 지나면 잔디가 자라서 무덤이 완전한 모습을 갖출 거라고 말했다.
마침내 집에 돌아와 케이크 박스를 열었을 때, 케이크는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무너져 내렸다. 3일을 방치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푸른곰팡이가 케이크를 뒤덮고 있었다. 유기농 친환경 케이크라는 문구가 케이크 상자에 쓰여 있었는데, 그 옆에 그려진 보라색 코끼리가 영정사진 속의 아버지처럼 멀끔한 얼굴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원래 행동이 느린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곰팡이에 놀라 떨어뜨린 케이크를 보며 어머니는 멍하니 서 있었다. 케이크는 널브러진 채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케이크는 내가 아니라 냉장고 안에 몰래 기생하는 것들의 몫이었다. 아버지의 무덤도 이 케이크처럼 잔디들의 몫이 될까? 그들에게도 생일과 기일이 있을까? 나는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는 초저주파음으로 귓속말을 했다는 코끼리들처럼 몰래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의 캐릭터를 만드는 이 일을 ‘숙제’라고 불렀다. 나는 거짓말을 못 하니까 어머니가 내게 질문을 해올 때를 대비한 일이었다. 길마 누나와 형들도 군소리 없이 숙제라는 말을 공유해 줘서 좋았다. 아버지의 기록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찾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런 연락이 왔다.
“그런데 숙제를 하려면 미리 캐릭터를 만들고 레벨업도 해 놔야 하지 않냐?”
그 말을 꺼낸 건 야수 형이었다. 그러고 보니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었다. 아버지가 플레이하던 게임이라는 알리바이가 성립하려면 그건 갓 만든 캐릭터여서는 안 됐다.
“오, 강록이 웬일로 머리가 좀 돌아간다?”
“백수의 저주로다.”
야수 형을 치켜세워 주는 분위기에 힘입어 나도 한마디 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레벨을 어디까지 올려놓으면 좋을까?”
“적어도 레이드 같이 돌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냐? 어머님에게 게임 플레이를 시켜 보는 게 계획이잖아.”
“협력의 저주로다.”
“어휴, 저 콘셉트 어떻게 할 거야. 정말.”
“저는 좋습니다만.”
“네가 다 받아 주니까 나날이 심해지잖니, 민형아.”
“아무튼 레이드를 뛸 수 있는 30레벨까지는 올려 두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러면 일단 캐릭터 먼저 만들어 올래? 이 게임 다중 클라이언트를 지원 안 하니까, 내가 쩔 좀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길마 누나.”
“혜진 누나라고 해도 된다니깐.”
“저는 이게 더 편합니다.”
“익숙함의…….”
잠깐 채팅방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오, 이게 더 열 받는다. 야, 그냥 해라.”
“저주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