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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정치인
· ISBN : 9788997871582
· 쪽수 : 528쪽
· 출판일 : 2022-08-25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1. 서양문명과의 만남
(1) 위정척사파 나라에서 성장
(2) 배재학당에서 만난 선교사들
2. 애국계몽운동
(1) 민주주의 첫 학습
(2) 언론인으로 출발
3. 왕조에 대한 저항과 감옥생활
(1) 황제에 대한 반역
(2) 5년 7개월의 감옥생활
(3) 기독교는 문명개화의 도구
4. 유학길에 맡은 정부밀사
(1) 선교사들 도움으로 미국유학
(2) 미 대통령 만나 독립보전 호소
(3) 조지워싱턴대학 시절
5. 외교전문가가 되기 위한 길
(1) 하버드대학 석사과정
(2) 프린스턴대학 정치학 박사
6. 잠시 귀국해 YMCA 활동
(1) 조심스러운 애국계몽운동
(2) ‘105인 사건’으로 미국 망명
7. 외교독립론의 정립
(1) 독립운동 기지가 된 하와이
(2) 무장투쟁론자와의 첫 충돌
8. 제1차 대전과 외교독립론의 실험
(1) 윌슨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 임시대통령 자격으로 외교·홍보활동
9. 상해에서 당한 수난
(1) 무장투쟁론자들로부터의 공격
(2) 좌우합작론자들의 비협조
10. 워싱턴 군축회의와 임시정부
(1) 시험대에 오른 외교독립론
(2) 탄핵으로 잃은 임시대통령직
11. 국제연맹에서 펼친 외교독립론
(1) 임시정부 전권대표로 복귀
(2) 동지이기도 한 아내 프란체스카
12. 임시정부 승인 투쟁
(1) 미국 대통령 설득이 목표
(2) 제2차 대전과 독립의 희망
13. 바뀌기 시작하는 미국의 태도
(1) 한국독립을 도운 미국인들
(2) 미 대통령에 전달된 독립의지
14. 한국독립 약속의 기적
(1) 1943년의 카이로 선언
(2)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
15. 소련과 반드시 협의하려는 미국
(1) 소련의 한반도 개입을 우려
(2) 샌프란시스코 연합국회의로부터 소외
16. 해방 후 소련과 미국의 점령정책
(1) 해방 당시의 이승만
(2) 소련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
(3) 좌·우파에 중립적인 미군정
17.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
(1) 모스크바 의정서의 파장
(2) 소련에 대한 미국의 헛된 기대
18. 자율적 정부수립으로 방향 전환
(1) 남한 과도정부의 추진
(2) 미군정은 좌우합작 추진
(3) 대한노총 위원장이 된 이승만
19. 대안 제시를 위한 미국 방문
(1)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 건의
(2) 트루먼 선언에 대한 감사
(3) 귀국길에 중국의 장개석 방문
20. 유엔으로 넘긴 한국독립 문제
(1) 다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2) 유엔의 남북한총선거 결의
21. 유엔 결의 실행을 둘러싼 대립
(1) 좌파와 중도파의 선거저지 운동
(2) 총선거를 못하게 될 위험성
22. 남한만의 선거를 허락한 유엔
(1) 남한만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
(2) 평양에 간 남북협상파
23.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국 305
(1) 1948년의 5·10선거
(2) 자유민주주의 제도들의 도입
24. 신생국의 불안한 출범
(1) 건국세력의 분열
(2) 힘들게 받은 유엔의 국가승인
25. 신생국의 취약한 국가기반
(1) 극심한 내부분열
(2) 서두른 농지개혁
26. 미군철수와 안보위기
(1) 1949년의 미군철수
(2) 북한의 오판을 부른 애치슨 발언
27. 6·25전쟁과 호국투쟁
(1) 대한민국 소멸의 위기
(2) 통일의 기회가 된 38선 소멸
(3) 중공군 참전과 통일의 좌절
28. 전쟁 중의 정치적 위기
(1) 국회와 대통령의 충돌
(2) ‘부산 정치파동’과 대통령 직선제
29. 휴전과 한미동맹
(1) 재침략의 위험을 남길 휴전
(2) 동맹확보를 위한 ‘벼랑끝 외교’
(3) 이승만을 달래려는 제네바 정치회의
30. 휴전 후 국가의 안정과 발전
(1) 자유민주주의 제도들의 정착
(2) 미국문명과 기독교의 영향
31. 국민교육과 인재양성
(1) 전쟁으로 높아진 고등교육 열기
(2) 전쟁으로 형성된 전문가 집단
32. 해양문명권 편입에 따르는 진통
(1) 미국과의 군사적·문명적 결합
(2) 1954년의 미국 국빈 방문
33. 시련의 ‘건국 대통령’
(1) 자유당의 인질이 된 이승만
(2) 물러날 때를 놓친 지도자
(3) 4·19혁명 이후의 이승만 지우기
34. 마지막 5년의 하와이 생활
(1) 국내체류를 어렵게 만든 상황
(2) 잊혀져 가는 ‘건국 대통령’
35. 이승만의 유산
(1) 인간적 면모
(2) ‘문명전환’의 시대적 역할
이승만 연보: 독립·건국·호국을 위한 투쟁 일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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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책속에서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양문명에 대해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값진 것은 정치적 자유(自由)의 개념이었다고 그는 나중에 회고했다. 그것은 모든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自由主義) 사상, 그리고 인민이 자유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뽑는 민주주의(民主主義) 제도를 의미했다.
그 같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개념은 군주제와 신분제밖에 모르던 이승만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그는 뚜렷한 삶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조선왕국을 미국, 영국과 같은 근대적인 국가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용만과는 달리 이승만은 독립운동이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한 외교와 홍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외교독립론자(外交獨立論者)였다. 한인들은 군사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은 강대국 미국이 일본을 전쟁에서 패배시킬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군사훈련을 하는 한인들이 미국인들에게 ‘테러리스트’로 비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1822년의 중립법이 미국 안에서 사적인 군사훈련을 금지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그 법은 미국 안의 소수민족들이 독립자금을 모으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다. 설사 한인들이 군사력을 갖추게 되어 일본에 대항하게 된다하더라도, 미국과 영국은 일본 편을 들게 되어 있다는 것이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의 도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제네바에서 이승만 개인에게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장차 헌신적인 아내가 될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을 만난 것이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빈 근처의 인처스도르프에서 철물 무역과 소다수 공장을 경영하는 중소기업가의 셋째 딸이었다. 그때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제네바로 와서 빈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이승만이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저녁 식사 때 사람들로 붐비고 있던 호텔 드뤼씨 식당이었다.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던 이승만이 종업원의 안내로 프란체스카 모녀와 합석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 이승만은 58세, 프란체스카는 33세의 나이였다.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지만, 며칠 뒤 프란체스카가 제네바를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빈에 들르면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모스크바에서 추방된 다음에도 빈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