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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일연 (지은이), 신태영 (옮긴이)
한국인문고전연구소
3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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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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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88997970018
· 쪽수 : 688쪽
· 출판일 : 2012-08-20

책 소개

우리의 삶과 함께하고 있는 신화와 전설, 즉 전래 이야기 중에서도 우리 이야기의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삼국유사를 우리시대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하여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젊은 한문학자와 국문학자들이 모여 만든 책이다.

목차

<제 1권>
기이 제 1

서문/고조선/위만조선/마한/이부/칠십이국/낙랑국/북대방/남대방/말갈과 발해/이서국/오가야/북부여/동부여/고구려/변한과 백제/진한/또 사계절에 따라 노니는 별장/신라시조 혁거세왕/제 2대 남해왕/제 3대 노례왕/제 4대 탈해왕/김알지/연오랑과 세오녀/미추왕의 죽엽군/내물왕과 김제상/제 18대 실성왕/사금갑/지철로왕/진흥왕/도화녀와 비형랑/하늘이 내려준 옥대/선덕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진덕왕/김유신/태종 춘추공/장춘랑과 파랑

<제 2권>
기이 제 2

문무왕 법민/만파식적/효소왕 시대 죽지랑/성덕왕/수로부인/효성왕/경덕왕?충담사?표훈대사/혜공왕/원성대왕/이른 눈/흥덕왕과 앵무새/신무대왕?염장?궁파/제 48대 경문대왕/처용랑과 망해사/진성여대왕과 거타지/효공왕/경명왕/경애왕/김부대왕/남부여?전백제?북부여/무왕/후백제 견훤/가락국기/

<제 3권>
흥법 제 3

순도가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하다/난타가 백제에 처음으로 불교를 열다/아도가 신라에 불교의 터전을 마련하다/원종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 순교하다/법왕이 살생을 금하다/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화상이 암자를 옮기다/동경 흥륜사 금당의 열 성인

탑상 제 4

동경 가섭불의 연좌석/요동성의 육왕탑/금관성의 파사석탑/고구려의 영탑사/황룡사의 장륙존상/황룡사 9층탑/황룡사의 종?분황사의 약사동상?봉덕사의 종/영묘사의 장륙존상/사불산?굴불산?만불산/생의사의 돌미륵/흥륜사의 벽화 보현보살/세 곳에 나타난 관음과 중생사/백률사/민장사/앞뒤로 가져온 사리/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분황사 천수대비가 눈 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다/낙산의 관음?정취 두 보살과 조신/만어산의 부처 영상/오대산에 있는 5만 부처의 진신/명주 오대산의 보질도 태자 전기/오대산 월정사의 다섯 성중/남월산/천룡사/무장사 미타전/백엄사의 석탑과 사리/영취사/유덕사/오대산 문수사의 석탑기

<제 4권>
의해 제 5

원광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보양스님과 배나무/양지스님이 지팡이를 부리다/인도에 간 여러 스님들/혜숙과 혜공이 속세에서 살다/자장법사가 계율을 정하다/원효는 얽매이지 않는다/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사복이 말을 하지 않다/진표가 간자를 전하다/관동 풍악의 발연수 석기/승전의 돌무더기/심지가 진표조사의 뒤를 잇다/유가종의 대현과 화엄종의 법해

<제 5권>
신주 제 6

밀본법사가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혜통이 용을 항복시키다/명랑법사의 신인종 ?

감통 제 7

선도산 성모가 불사를 좋아하다/여종 욱면이 염불하여 극락으로 가다/광덕과 엄장/경흥이 성현을 만나다/진신 석가 공양을 받다/월명사의 도솔가/선율이 죽었다가 살아나다/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융천사의 혜성가/정수스님이 얼어붙은 여인을 구하다

피은 제 8

낭지의 구름 타기와 보현보살의 나무/연회가 명예를 피해 달아났다가 문수점에서 도를 얻다/혜현이 고요함을 구하다/신충이 벼슬을 버리다/포산의 두 성사/영재가 도적을 만나다/물계자/영여사/포천산의 다섯 비구/염불사/

효선 제 9

진정법사의 효도와 선행이 둘 다 아름답다/대성이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게 효도하다/향득 사지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를 공양하다/손순이 자식을 땅에 묻으려 하다/가난한 여인이 어머니를 봉양하다


왕력
발문
옮긴이 해제

저자소개

일연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은 전씨, 이름은 견명, 자는 회연, 호는 무극·목암이다. 경주 장산군(지금의 경산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방 향리 출신인 언필이다. 1206년(희종 2년)에 태어나 1289년(충렬왕 15년) 입적하였다 충렬왕 3년 운문사에 머무르면서 『삼국유사』 집필에 착수하였다.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불교 신앙을 표방하는 저술을 찬술했으며, 선과 교를 막론하고 많은 불교 서적을 편수하였다. 9세 때 해양(지금의 光州) 무량사에서 취학했으며,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하여 대웅장로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227년(고려 고종 14년) 선불장에 나아가 상상과에 급제한 이후 포산(현풍현 비슬산)의 보당암·무주암·묘문암 등지에서 머물렀으며, 1237년 삼중대사가 되고 1246년 선사가 되었다. 대몽항쟁기 일연은 포산에서 22년을 보내면서 뚜렷한 행적을 남기지 않았다. 1249년 최씨 무인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에 머물게 되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최이에게 반발한 정안이 수선사 계통의 승려를 기피하여 가지산문의 일연을 초청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가지산문의 승려들이 최씨 정권과 연결되어 1251년에 완성된 대장경 조판 중 남해분사에서의 작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1259년 대선사가 되었고, 1261년(원종 2년) 원종의 명에 따라 강화도에 초청되어 선월사에 머물렀는데, 이때 지눌의 법맥을 계승했다. 이는 그가 가지산문(헌덕왕 때 보조선사 체징이 도의道義를 종조宗祖로 삼고 가지산 보림사에서 일으킨 선풍)에서 사굴산문(범일이 강릉의 굴산사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사굴산파 또는 굴산선파라고 함)으로 법맥을 바꾼 것이 아니라 원종을 옹위한 정치세력이 불교계를 통솔하기 위해 일연을 이전의 수선사 계통의 승려를 대신한 계승자로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1268년 왕명에 의해 운해사에서 대장낙성회를 주관하고, 1274년 비슬산 인홍사를 중수한 후 왕의 사액에 따라 인흥사로 개명했으며, 같은 해 비슬산 용천사를 불일사로 개명했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골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283년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 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1284년에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 군위 화산의 인각사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경상북도 군위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를 두 번 개최하였다. 1289년 금강인을 맺고 입적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와 죽허가 있다. 저서에는 『삼국유사』 5권, 『선문염송사원』 30권, 『화록』 2권, 『게송잡저』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 2권, 『대장수지록』 3권, 『제승법수』 7권, 『조정사원』 30권 등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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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영 (옮긴이)    정보 더보기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노수신(盧守愼)의 시를 연구하여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명나라 사신과 조선 접반사 사이의 문학적 교류 양상을 연구한 <황화집(皇華集) 연구(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주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한국문집 소재 부(賦) 역주 해제> 프로젝트에 연구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청주대학교 학술연구소의 연구원을 지냈다. 성균관대·청주대·안동대·한림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저서로 <명나라 사신은 조선을 어떻게 보았는가 -황화집 연구->(다운샘), 공저로 <옥동 문익성 및 그 후예들의 학문과 문학>(술이), 중학교 <한문> 교과서(장원교육) 등이 있다. 현재 조선과 명의 문화 교류에 대해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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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 27대 덕만(德曼)[만(曼)을 만(萬)이라고도 한다.]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서기 632)에 왕위를 올라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앞일을 미리 안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당 태종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는데,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였다.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씨를 뜰에 심도록 명하였다. 그 꽃이 피었다 지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둘째,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玉門池)에서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4일 동안이나 울어대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급히 각간인 알천(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 2천 명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어보면 그곳에 반드시 적군이 있을 것이니, 습격해서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숨어 있기에 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오소(亐召)란 자가 남산(南山)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또 포위하여 활을 쏘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병사 1,200명이 왔지만 역시 쳐서 죽였으니,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셋째, 왕이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여러 신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利天) 속에 장사 지내라.”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다시 어디인지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다.”
그 달 그 날이 되자 왕은 과연 세상을 떠났다. 여러 신하들이 낭산의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때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제 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이며 성은 김씨이다. 용수(龍樹)[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왕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로, 곧 김유신(金庾信)공의 막내 동생이다.
처음 문희의 언니인 보희(寶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수도인 경주에 가득 찼다. 다음날 동생에게 꿈 얘기를 했더니 문희가 말하였다.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
언니가 말하였다.
“무엇을 주겠니?”
“비단치마를 주면 어때요?”
“그러자!”
언니가 허락하여 동생 문희가 옷섶을 벌리고 꿈을 받으려고 하자, 언니가 말하였다.
“어젯밤 꿈을 너에게 주노라!”
동생은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정월 오기일(午忌日)[앞의 사금갑(射琴匣)에도 보이는데, 곧 최치원(崔致遠)의 설이다.]에 자기 집 앞에서 공을 찼다.[신라 사람들은 공을 차는 것을 ‘구슬을 가지고 노는 놀이’라고 하였다.] 김유신은 일부러 춘추공의 옷을 밟아 고름을 떨어뜨리게 하고 말하였다.
“우리집에 들어가서 꿰맵시다.”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에게 바느질을 하라고 하자 아해가 말하였다.
“어떻게 이런 사소한 일로 함부로 귀공자를 가까이 하겠어요?”
그러면서 아해는 한사코 못하겠다고 하였다.[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아지(阿之)에게 시켰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문희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자주 유신의 집을 왕래하였다.
유신공은 누이동생이 임신을 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네가 부모님께 아뢰지도 않고 임신을 하였으니 어찌된 일이냐?”
그리고는 곧 서울 안에 소문을 내기를 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하였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에 행차할 때를 기다려서 마당에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붙여 연기가 일어나게 하였다. 왕이 그것을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묻자, 주변에 있던 신하들이 아뢰었다.
“아마도 유신이 그 누이동생을 불 태우려나 봅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이것은 누구의 소행이냐?”
때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있다가 얼굴색이 크게 변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이것은 너의 소행이구나. 속히 가서 구하도록 하여라.”
춘추공은 명을 받고 말을 달려가 왕명을 전하고 화형을 중지시켰다. 그 후에 세상에 드러내놓고 혼례를 올렸다.


“이 산의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해지는 것은 어찌해서인가?”
용이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합해진 연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거룩하신 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서 불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마음을 합치셔서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왕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서 오색찬란한 비단과 금과 옥으로 용에게 보답하였다. 그리고 명을 내려 대나무를 베도록 하였는데, 바다에서 나올 때 산과 용이 홀연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는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태자 이공(理恭)[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다.]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일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축하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옥대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이 옥띠의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 다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태자가 아뢰었다.
“하나를 따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왼쪽 두 번째 것을 따서 계곡물에 넣었더니 곧 용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 땅은 연못이 되었다. 그래서 이 연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부른다.
왕이 대궐로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였다.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면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었으며,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성왕 때인 천수 4년 계사(서기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오는 이상한 일이 있어서, 다시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하였다. 부례랑의 전기에 상세히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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