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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야 할 중학교 문학 첫걸음 : 고전

꼭 읽어야 할 중학교 문학 첫걸음 : 고전

일연, 허균 (지은이), 한재진 (엮은이), 문구선 (그림)
스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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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야 할 중학교 문학 첫걸음 :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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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꼭 읽어야 할 중학교 문학 첫걸음 : 고전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고전
· ISBN : 9791165816056
· 쪽수 : 172쪽
· 출판일 : 2025-10-01

책 소개

《꼭 읽어야 할 중학교 문학 첫걸음 - 고전》을 통해 오랜 시간 사랑받은 이야기 속에서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과 생각, 고민과 꿈을 만나 보자. 현재를 더 잘 이해하고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목차

1. 아기 장수 우투리 · 작자 미상
2. 오늘이 · 작자 미상
3. 서로를 지켜 준 효자와 호랑이 · 작자 미상
4. 바보 사또 · 작자 미상
5. 열두 살 나이에 고구려를 세우다-주몽 · 일연
6. 심청전 · 작자 미상
7. 토끼전 · 작자 미상
8. 춘향전 · 작자 미상
9. 홍길동전 ·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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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출처 및 수록 교과서

저자소개

일연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은 전씨, 이름은 견명, 자는 회연, 호는 무극·목암이다. 경주 장산군(지금의 경산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방 향리 출신인 언필이다. 1206년(희종 2년)에 태어나 1289년(충렬왕 15년) 입적하였다 충렬왕 3년 운문사에 머무르면서 『삼국유사』 집필에 착수하였다.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불교 신앙을 표방하는 저술을 찬술했으며, 선과 교를 막론하고 많은 불교 서적을 편수하였다. 9세 때 해양(지금의 光州) 무량사에서 취학했으며,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하여 대웅장로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227년(고려 고종 14년) 선불장에 나아가 상상과에 급제한 이후 포산(현풍현 비슬산)의 보당암·무주암·묘문암 등지에서 머물렀으며, 1237년 삼중대사가 되고 1246년 선사가 되었다. 대몽항쟁기 일연은 포산에서 22년을 보내면서 뚜렷한 행적을 남기지 않았다. 1249년 최씨 무인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에 머물게 되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최이에게 반발한 정안이 수선사 계통의 승려를 기피하여 가지산문의 일연을 초청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가지산문의 승려들이 최씨 정권과 연결되어 1251년에 완성된 대장경 조판 중 남해분사에서의 작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1259년 대선사가 되었고, 1261년(원종 2년) 원종의 명에 따라 강화도에 초청되어 선월사에 머물렀는데, 이때 지눌의 법맥을 계승했다. 이는 그가 가지산문(헌덕왕 때 보조선사 체징이 도의道義를 종조宗祖로 삼고 가지산 보림사에서 일으킨 선풍)에서 사굴산문(범일이 강릉의 굴산사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사굴산파 또는 굴산선파라고 함)으로 법맥을 바꾼 것이 아니라 원종을 옹위한 정치세력이 불교계를 통솔하기 위해 일연을 이전의 수선사 계통의 승려를 대신한 계승자로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1268년 왕명에 의해 운해사에서 대장낙성회를 주관하고, 1274년 비슬산 인홍사를 중수한 후 왕의 사액에 따라 인흥사로 개명했으며, 같은 해 비슬산 용천사를 불일사로 개명했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골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283년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 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1284년에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 군위 화산의 인각사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경상북도 군위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를 두 번 개최하였다. 1289년 금강인을 맺고 입적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와 죽허가 있다. 저서에는 『삼국유사』 5권, 『선문염송사원』 30권, 『화록』 2권, 『게송잡저』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 2권, 『대장수지록』 3권, 『제승법수』 7권, 『조정사원』 30권 등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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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지은이)    정보 더보기
허균(許筠, 1569∼1618)은 어떤 사람인가? 흔히 허균은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또는 반역을 기도하다가 처형된 인물로 운위된다. 《홍길동전》에 나타나는 적서 차별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이 허균의 평소 염원을 반영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의견은 허균과 거리를 두어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적대적 인물의 전언(傳言)에만 등장할 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허균이 반역을 도모했는가 하는 문제 역시 진위가 불분명하다. 조선 시대에 반역죄로 처형된 여타 인물의 경우와 달리, 허균에 대해서는 직접적 물증 없이 주변 인물들의 증언만으로 사형이 결정되었기에 ‘훗날 반드시 이론(異論)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기도 할 정도다. 이처럼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음에도 위의 두 가지 사안은 학교 교육이나 대중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그 결과 일반 대중이 허균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허균에 관한 직접 경험이 아니라 허균에 대한 소문을 채록한 야사(野史) 계통의 자료에 의존한 현대의 전언들이 허균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증폭시킨 면이 있다. 하지만 신빙성 있는 1차 자료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허균의 면모는 그런 대중적인 인식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는 조선 시대를 풍미한 사상과 문화, 정치 제도에 순응한 점에 있어서는 동시대의 여느 관료 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허균은 유가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에 대한 학습 및 내재화, 충효라는 덕목에 대한 숭상과 실천을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으로 인정한다. 본서에 수록한 〈엄처사전〉은 물론, 〈학산초담〉을 비롯한 초기작이나 허균의 나이 40대 초반에 쓴 〈학론(學論)〉(1610) 같은 글에서 일관되게 이 입장이 견지되고 있다. 흔히 허균이 당대 관료나 사대부 문인들과 구별되는 개성을 지녔다 해 운위되는 것이 불교 서적이나 도가 사상에 대한 애호라고들 한다. 하지만 도가적 어휘가 대거 등장하는 〈남궁선생전〉을 쓴 이후에도 〈학론〉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정치의 기본 원리로서 성리학의 기본적 사유 방식을 옹호한 점은 특기될 필요가 있다. 또한 허균이 혁명 내지 사회 개혁을 도모한 인물로 거론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호민론〉이다. 〈호민론〉에 피력된 입장은 민(民)의 역량에 대한 호감과 긍정이 아니라, 민의 불만을 조기에 무마해야 기성 지배층의 안정적 집권이 가능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라는 점이 최근 연구들에서 지적되어 왔다. 민에 대한 허균의 입장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으며, 이 점은 본서에 수록한 〈남궁선생전〉의 조회 장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은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기성의 가치에 상당히 동조하는 가운데 주류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던 인물이다. 40대 이후에 정계의 고위직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꺼이 그에 응했던 사실은 허균의 본심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연마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이 상류층이기에 접근할 수 있었던 문화 자원을 적극 활용했다.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는 대부분 그의 사회적 지위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다양한 자원들에 힘입고 있다. 가령 허균의 척독과 같은 초단형(超斷形)의 편지 양식이나, 그의 산문 창작에 있어서 중요한 참조점이 된 《세설신어》 같은 책은 단지 허균이라는 한 개인의 기호에 의해 개발되거나 주목된 책이 아니다. 선조?광해군 연간 조선 문단에서는 명대 문학, 특히 강남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서 애호된 문학 양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허균 역시 이러한 동향에 참여하고 있었다. 《세설신어》 역시 강남 사대부들 사이에서 16세기에 재발견되고 주목된 서적 중 하나다. 한 단락 정도 되는 짧은 분량의 일화나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동원해 묘사하고자 하는 인물의 품성을 간결하게 스케치하는 《세설신어》의 스타일은 위진 남북조 시대에 나온 것이지만, 당시 명대 문학을 선도하고 있던 16세기 강남 문단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16세기 말 명대 문단을 주도했던 왕세정(王世貞, 1526∼1590)에 의해 1585년에 《세설신어보》가 출간되고, 이어서 《세설신어》를 모방한 각종 후속 작품이 대거 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대 강남 사대부 문인 그룹 내에서 《세설신어》가 크게 유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제기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당대 강남의 경제적 부흥에 힘입어 문화적 소양이 일천한 신흥 부유층이 부상했고, 이들의 도전에 응전하는 기성 사대부 계층은 자신들이야말로 선천적인 차원에서 우수한 문화적 소양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을 정립해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지(李贄, 1527∼1602)나 원굉도(袁宏道, 1568∼1610)처럼 문학에 있어 개성 표현의 가치를 중시한 것도, 강남 지역의 그러한 문화적 동향의 한 단면으로, 기성 사대부들의 문화적 권위를 수성하려는 경향의 한 지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시야에 넣고 다시 허균의 저 유명한 발언,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라는 개성 중시의 선언을 되짚어 보면, 일견 독창성을 중시하는 듯한 허균의 지향 역시 보다 넓은 문화적 흐름의 일부일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실로 허균은 《세설신어》를 비롯해 왕세정으로 집약되는 강남 문인 사회의 문예적 동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허균은 그의 〈사우재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세설체 저작의 저자이자 왕세정과 더불어 강남의 문예 담론을 주도했던 인물인 하량준(何良俊, 1506∼1573)의 글에 대해서도 열렬한 호감을 표했다. 특히 명 사신이자 강남 출신 문인인 주지번(朱之蕃, 1558∼1624)과 1606년에 직접 만난 이후로는, 강남의 문인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회화, 서예, 미식 등 다채로운 문화적 활동 전반으로 관심의 폭을 확장해 갔다. 작문에 있어서도 기성의 전범이나 관습을 답습하기보다 글쓴이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 역시 주지번과의 만남 이후 뚜렷하게 정식화된다. 요컨대 동시대 조선 관료 문인과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허균의 개성도 좀 더 시야를 확대해 보면 일정한 문화적 동향과의 동질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면이 있다. 이상에서 짚어 본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허균은 당대 조선 사회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일종의 고급문화에 깊이 침잠함으로써 자신의 소양을 형성해 나갔으며, 결국 허균의 문학적 성취와 개성 강조의 문학론은 단순한 개인의 독창성의 발로라기보다는, 조선 중기 사대부 문화와 명대 강남 문인 문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결과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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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선 (그림)    정보 더보기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습니다. 어릴 적 추억이나 두 아이를 키우며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아이와 어른이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래 두고 꺼내 보아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우리 엄마가 좋은 10가지 이유>, <할머니의 레시피>, <동생이 싫어>, <쿠키 한 마리, 멸치 두 알> 등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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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러면 간을 어디다 두었느냐?”
“예, 간 둔 곳을 말씀드리겠사옵니다. 인간 세상으로 깊이 들어가면 영주산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꼭대기에는 1,000년 묵은 소나무가 있사옵니다. 그 소나무 늘어진 가지 하나, 둘, 셋째 가지 끝에다 매달아 놓았사옵니다. 칡잎으로 약봉지 싸듯 꽁꽁 싸서 매달아 놓고 왔으니 옥황상제나 떼어 가지, 다른 어떤 사람도 손을 대지 못할 것이옵니다.”
왕이 좌우의 여러 신하를 돌아보며 말한다.
“배를 갈라 간이 있으면 좋거니와 만약 없으면 공연히 불쌍한 목숨만 끊고 간을 구하지 못할 것이니, 토끼를 살려 주는 것이 어떻겠소?”
여러 신하가 함께 머리를 조아린다.
“전하 하교 마땅하여이다.”
……
-작자 미상〈토끼전〉중에서


금 술잔의 향기로운 술은 일만 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농이 떨어질 때 뭇 백성들의 눈물도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도 높더라.
이렇게 시를 지어 보여 주니 술 취한 변 사또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운봉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아뿔사, 일이 났구나.”
시를 짓고 난 어사또가 유유히 물러나자마자 운봉이 공형 불러 분부하되,
“야야, 큰일 났다.”
……
-작자 미상〈춘향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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