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한국고대사 일반
· ISBN : 9788984947160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24-04-30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흥법편>
고구려의 불교를 연 순도
마라난타가 백제의 불교를 열다
아도가 신라 불교의 터를 닦다
원종이 불법을 흥성케 하고자 하니 염촉이 몸을 바치다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보장왕이 노자를 숭상하므로 보덕 스님이 승방을 옮기다
경주 흥륜사 금당의 열 분 성인
<탑상편>
가섭불 연좌석
요동성의 아육왕 탑
금관성의 파사석탑
고구려의 영탑사
황룡사의 장륙상
황룡사의 구층탑
황룡사의 종, 분황사의 약사상, 봉덕사의 종
영묘사의 장륙상
사불산‧굴불산‧만불산
생의사의 돌미륵
흥륜사의 보현보살 벽화
세 곳의 관음상과 중생사
전후로 가져온 사리
미륵 선화, 미시 화랑, 진자 스님
남백월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분황사 천수 관음상이 눈먼 아이의 눈을 뜨여 주다
낙산사의 두 성인, 관음보살과 정취보살 그리고 조신
만어산의 부처님 그림자
오대산의 오만 진신
명주 오대산 보질도 태자 전기
오대산 월정사의 다섯 성중
남월산
천룡사
무장사의 미타전
백엄사 석탑의 사리
영축사
유덕사
오대산 문수사 석탑기
책속에서
불교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이를 자신들의 종교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그런 진통을 겪고 나서야 다음 사회에 불교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게 된 과정이 잘 나온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마다 불교를 받아들일 당시의 환경은 저마다 다 달랐지만, 그래도 자기
서울 뚝섬에서 출토된 5세기 고구려 금동불좌상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대의를 위해 희생한 스님이나 신도가 있었기에 불교가 안착될 수 있게 되었음은 똑같다. 그리고 여기에 왕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도나 중국에서 온 스님에게 불교를 처음 접한 왕은 불교의 뜻과 가치를 이해하여 돈독한 불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찰을 짓거나 승려를 공식적으로 출가시키는 등 불교 전파를 국가 정책으로 삼아 불교 관련 제도를 갖추는 데 앞장서고, 귀족이나 관료들도 이에 잘 부응했던 것 같다. 이런 모습은 특히 고구려와 백제가 판박이처럼 비슷하였고, 그 결과 고구려 소수림왕과 백제 침류왕의 불교 진흥 정책은 처음부터 큰 무리 없이 이뤄질 수 있었다.
-「삼국시대 불교 초전(初轉)의 양상」에서
양나라와 당나라의 두 승전[《고승전》‧《속고승전》]과 삼국 본사[《삼국사기》]에 모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 대원(太元, 376~396) 연간이라고 하였다. 순도와 아도 법사가 소수림왕 갑술에 고구려에 왔음이 명확하므로 이 전들은 그릇되지 않았다.… 대체로 나라 사람들은 들은 대로 묵호‧아도 두 이름에 따라 두 사람으로 구분하여 전한 것이다. 더군다나 아도의 겉모습이 묵호와 비슷하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를 가지고도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대로 꼽은 것은 바로 창건의 선후를 미리 알고 말한 것이나, 두 전기(아도의 비석, 《해동고승전》)가 잘못되었기에 여기에서는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넣었다. -「아도가 신라 불교의 터를 닦다」에서
1281년은 그가 이 글을 쓴 시기일 테니 《삼국유사》 집필 과정을 추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일연은 이 전설의 가섭불 연좌석을 찾아가 그 크기까지 재어서 자세히 적어놓았다. 돌의 형태가 일부 부서진 건 1238년 몽골군의 침략 때문이라고 고증도 했다. 지금 황룡사지 목탑 자리 한가운데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놓여 있어 이를 일연이 말한 가섭불 연좌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일연이 가섭불 연좌석이라고 믿었던 그 바위인지는 알 수 없다.… 일연이 〈탑상〉의 처음을 광대무변한 우주의 나이와 개벽이 나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음도 드넓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비롯한 만물은 모두 인연으로 태어나고 살아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여하튼 신라에 가섭불이 좌선했던 자취가 있으니 여기가 불교와 큰 인연이 있는 땅임을 강조하려 했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가섭불 연좌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