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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98328863
· 쪽수 : 308쪽
· 출판일 : 2014-11-01
책 소개
목차
1권
0. 프롤로그
1. 메이커? 메이킹!
2. 이상한 나라의 리리
3. 자유롭게, 좋을 대로
4. 사라진 동쪽 섬, 새디아
외전. 리리
후기
2권
09. 오늘과 다른 내일
10. 험난한 예술가의 길
11. 음악치료사? 연애술사!
12. 그녀의 이중생활
후기
3권
09. 오늘과 다른 내일
10. 험난한 예술가의 길
11. 음악치료사? 연애술사!
12. 그녀의 이중생활
후기
4권
13. 건국제는 폭풍을 싣고
14. 자만하지 말지어다.
15. 새로운 시작을 위한 끝
외전
후기
책속에서

리리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인상을 찌푸리며 어슴푸레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순간 리리의 몸이 굳었다. 그 반응에 남자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는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겁을 먹었나 보군. 그래, 더욱 무서워하도록 해라. 겁에 질려 애원하는 모습이 가장 사랑스럽거든.”
“……냐.”
“뭐라고 했지?”
“미쳤냐고. 야, 이 아청법에 걸려 은팔찌차고 잡혀 들어가 손톱깎이로 조금씩 뜯어죽일 놈아. 이런 식으로 몇 명이나 건드렸냐? 와, 나……. 진짜 상종 못 할 놈이네. 이런 놈이 정말로 존재하는구나. 이런 건 그냥 영화나 소설 속에나 나오는 얘긴 줄만 알았는데. 와, 멘붕.”
방 안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차마 눈에 담기도 싫은 변태적인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실제 스물네 살. 알만한 것은 다 아는 나이었지만, 아니 오히려 더 잘 알았기에 화가 났다.
“뭐, 뭐라? 지금 뭐라고?”
남자 또한 붉으락푸르락하며 화를 냈다.
“이, 이것이 미쳤나!”
“야, 미친 건 너야! 진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너 내가 몇 살인 줄 아냐? 열 살이야, 열 살. 니 손자들 또래라고, 이 십세 같은 아저씨야. 여긴 18세부터 성인으로 치지? 열여덟 살짜리한테 해도 범죄라고 할 판에 뭐? 꿈도 꾸지 못했을 행운? 아오, 이 십팔세 같은 놈들.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 같으니라고.”
더 이상 말해봐야 입만 아플 듯했다. 리리는 아이템창에서 부적을 꺼내 들었다.
대략의 이야기는 듣고 왔지만, 이 방 안의 물건들을 보니 아이들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일을 당한 것 같았다.
그녀가 부적을 꺼내 들자 남자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잠시 주춤하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뭘 모르는 모양이구나! 나는 안시오 히로크 남작이다! 네까짓 게 함부로 할 수 없는 귀족이란 말이다!”
리리는 시키지도 않은 자기소개에 비웃음을 흘렸다.
“어이구, 잘나셨습니다. 난 또 공작 나으리나 황제느님 정도는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안시오 히로크 남자악? 어디서 남작 따위가 깝쳐, 깝치기는. 야, 너 죽었다고 세 번 복창해라.”
리리는 왜 이렇게 남작들과 인연이 많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부적을 날렸다.
“정말이지, 자네처럼 실력이 나쁜 사람은 처음 본다네! 발로 그려도 이 정도까진 아닐 것 같은데 말일세. 그래도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욕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그것마저 없었으면 갓난아기한테나 가르칠 법한 기초나 하고 있지는 않았을 거네.”
“바, 발그림이요? 갓난아기요?”
애써 좋아졌던 페안 선생의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정말 거침없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기초는 배웠으니 그래도 저번보다 낫겠지. 어디 한번 자유롭게 표현해보게나.”
리리는 천천히 연필을 들어 올렸다. 저번과 같은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확실히 자만하고 있었어. 당연히 뭐든지 잘해낼 거라고 생각했지. 이제 막 미술을 배우는 주제에 로쉐와 젤리를 그리려고 하다니.’
심지어 보는 것만으로도 황송해지는 잘생긴 두 남자가 아니던가. 감히 그녀가 그려낼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미술 교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다 간단하게 생긴 물건 하나를 선택했다.
‘보고 그리자. 그러면 아무리 못 그려도 어느 정도 틀은 잡힐 거야.’
그녀는 최대한 집중한 채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조용한 교실 내부에 연필 소리만 울려 퍼졌다.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새 흘러가 버렸다. 리리는 완성된 그림을 조금 멀찍이 떨어져 훑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페안 선생 역시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초딩손의 위엄이란. 너 혹시 혼자 움직이니? 뇌의 지배를 받지 않는 거야?’
어이없는 생각이 들 만큼 따로 노는 손이었다.
리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리려고 했던 것이 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엉망인 그림이었다. 심지어 연필로 그린 터라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페안 선생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제목은……. 「늪」으로 짓는 것이 좋겠군.”
“늪……이요?”
제목이라니. 그래도 예술 작품으로 인정했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녀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원래 예술은 해석하기 나름 아니던가.
보는 이의 안목에 따라서 예술품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
‘그래! 추상화라고 생각하지, 뭐. 늪에 빠져 들어가는 절망적인 마음을 표현한 그림인 거야.’
애초에 정물화로 그리기 시작했다는 건 굳이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리리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까지 마친 채 그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진 페안의 말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정말……. 할 말이 없군. 이렇게 기분 나쁜 그림이라니. 보는 이들을 질척한 늪 속에 밀어 넣는 느낌이야. 당장 찢어 버리게.”
예술을 아끼는 그가 폐기하라고 할 정도라니 얼마나 엉망진창이란 말인가.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바쁜 리리의 눈앞에 시스템창까지 떠올랐다.
† 호칭 「시각 파괴자」가 등록되었습니다.
† 좋지 않은 호칭으로 인해 명성이 5 하락했습니다.
† 시각 파괴자
::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녔다. 아름다운 작품은 가슴을 울리고 웃긴 작품은 웃음을 전염시킨다. 좋지 않은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유발할 수밖에 없으며, 정도에 따라서 눈에 무리를 주기도 한다. 페안은 스스로의 시각을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러고는 「시각 파괴자」라는 호칭을 지어내 사람들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주고자 했다.
「시각 파괴자가 그린 그림을 보는 이들의 스트레스 수치가 5~10 증가한다. 작품에 따라서 상태 이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호칭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안함과 호기심을 일으킨다.」
그렇지 않아도 절망스럽다 못해 땅 파고 들어가기 일보 직전의 리리에게 무덤 자리를 알아봐 주는 호칭이었다. 심지어 스트레스를 증가시키고 심하면 상태 이상까지 불러일으킨다니.
‘이런 호칭 따위 주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절망적이라고.’
좋은 호칭에는 고작 호감이나 신뢰감 증가 따위의 말밖에 없더니 이런 나쁜 호칭에는 스스로의 시각을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의 큰 충격이라느니 불쾌감을 유발한다느니 눈에 무리를 준다느니 하는 온갖 부가효과가 다 붙어 있었다. 혹시 예전에 「변의 요정」이라는 호칭도 이와 비슷했을까,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근데 어디서 본 것 같다. 뭐지?’
그녀는 잠시 설명을 곱씹어보다 놀라고 말았다.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부분은 예전에 실패했던 요리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혹시 2% 부족하다는 설명도 이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 부족한 것이 설마 손재주?”
단순히 나이가 어린 육체여서 실력이 부족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녀가 실제 나이 열 살일 때도 이 정도로 못하지는 않았다. 그 말은 이 몸이 선천적으로 손재주가 최악이라는 소리였다.
‘혹시 손재주와 관련된 것들은 전부 이런 꼴 나는 거 아니야?’
또다시 불길한 생각이 리리를 덮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