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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역사
· ISBN : 9788998625023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13-07-15
책 소개
목차
머리말 | 수업 시간에 못 다한 우리 역사 이야기
01. 고조선에 대한 오해와 진실
단군은 어쩌면 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 고조선은 신석기 때 세워졌다?
02. 삼국의 첩보 작전, 그가 스파이일 줄이야!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다시 백제로 온 ‘사기’
장수왕이 백제에 보낸 스파이 ‘도림’ | ‘임자’는 신라의 스파이인가?
[역사 책갈피] 연개소문의 아들이 당나라 장수?
03. 나는 그런 왕이 아니라오!
고구려 태조왕은 주몽이 아니다 | 의자왕은 진짜 삼천궁녀를 거느렸을까?
당한 만큼 복수한 신라의 실성왕
04. 신라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화랑은 화장을 해야 한다? | 신라인들의 화장 기술 | 신라에는 대중목욕탕이 있었다
05. 고구려 부흥 운동을 왜 백제 땅에서 했을까?
신라가 고구려 부흥 운동을 도운 이유 | 안승이 백제 땅에 세운 보덕국
고구려 부흥 운동에 보장왕이 나섰다고?
[역사 책갈피] 고려 시대에 삼국 부흥 운동이라니?
06. 발해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발해의 말갈족을 생각하다 | 발해의 놀라운 여성 파워
07. 이거, 고려에 있었던 것 맞아?
우리나라 소주는 고려 때 몽골이 전해 주었다? | 설렁탕의 기원은 고려일까, 조선일까?
[역사 책갈피] 몽골에 남아 있는 ‘고려병’
08. 그 건축물은 정말 그때 지어졌을까?
부석사 무량수전은 언제 지어졌을까? | 불국사는 신라인만의 작품이 아니다
[역사 책갈피]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명나라가 쌓았다?
09. 고려 시대에 노비로 살아간다는 것
양인으로 되돌려주마, 노비안검법 | 다시 노비로, 노비환천법
노비에서 벗어나려는 자와 노비가 되려는 자
10. 몽골 침입 때만 왕이 개경을 떠난 게 아니다
거란군을 피해 나주로 간 현종 | 공민왕은 왜 안동에 70여 일을 머물렀을까?
국경의 큰 골칫거리, 거란족과 여진족
11. 몽골 항쟁 때의 개경 환도는 과연 굴욕일까?
고려 태자의 외교력이 고려를 살렸다? |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삼별초의 항쟁
12. 정도전, 그의 영광은 짧았다
고려 말 정도전의 승승장구? No! | 정도전,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다
[역사 책갈피] 절친 정도전과 조준의 같은 길, 다른 길
13. 한양, 조선의 도읍 되기 참 어렵네
원래는 도읍을 계룡산으로 하려고 했다 | 개경으로 ‘컴백 홈’하다
동전 던지기로 결정 난 한양 천도
14. 한글을 만든 사람, 그리고 지킨 사람
훈민정음은 집현전과 세종의 공동 작품? | 사랑을 쓰려거든 한글로 쓰세요
[역사 책갈피] 주시경은 주보따리
15. 과거 합격은 가문의 영광, 불합격은?
과거가 맺어준 부자지간 인연 | 조선 시대 과거에도 부정행위가 있었다
[역사 책갈피] 과거 합격과 또 다른 기다림
16. 세자가 된다는 것, 세자로 산다는 것
대역 죄인으로 몰린 소현세자의 부인 |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지 않은 장인, 홍봉한
대군인데도 세자가 되지 못한 영창대군
17. 세도정치와 지역 차별의 역사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만 있는 게 아니다 | 홍경래는 왜 서북 지역이 차별받는다고 했을까
18. 정조는 언제나 개혁 군주였을까?
자유로운 문체를 비판한 정조 | 개혁 기구 규장각이 개혁 대상이 되다
[역사 책갈피]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
19. 알면서도 잘 모르는 흥선대원군 이야기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천주교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는 왜 천주교 배척으로 마음을 바꿨을까? | 명성황후와의 대립, 그 속사정
20. 역사 용어를 아무렇게 써서는 안 되는 이유
을사조약일까, 을사늑약일까? | 일제강점기의 길목, 합방과 병합과 병탄의 차이
[역사 책갈피] 일왕과 천황, 뭐라고 불러야 하나?
21. 애국과 친일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의 친일 행적 논란 | 이광수의 친일 행위는 변절이라 할 수 없다?
22.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
한국의 독립 운동가, 헐버트 | 억눌린 한국 사람들의 대변인, 베델
[역사 책갈피]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의 외국인 묘
23. 제자리를 찾아가는 건물들
창경궁에는 코끼리가 있었다 | 제 모습을 찾는 덕수궁 석조전
[역사 책갈피] 강제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1,908세를 살았고, 《동국통감》에는 1,048세까지 살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둘의 나이 차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단군이 1천 년 이상을 살았다고 표현된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여러 학자들은 단군이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단군’이란 말은 특정한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고조선의 군장(혹은 임금)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단어라는 의견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1,908세라고 하는 것은 1,908년 동안 단군의 칭호가 이어져 왔다는 의미이겠지요.
_ 「단군은 어쩌면 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중에서
태종은 늙은 아버지가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강하게 주장하자 마음속으로 다시 한양으로 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륜 등의 신하들은 이를 거세게 반대하며 태종을 곤란하게 했지요. 태종의 고민은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디로 가겠다는 결단이 아니라 점을 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척전법’입니다. 태종은 종묘에 가서 어느 곳에 도읍을 정할지 동전으로 정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정해지면 그것이 조상님의 뜻이므로 그 누구도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_ 「동전 던지기로 결정 난 한양 천도」 중에서
1882년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구식 군인들과 도시 빈민층 등이 임오군란을 일으켰습니다. 명성황후는 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결국 실종되고 말지요. 바로 이때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아마 시신도 없이 두 번의 장례식을 치른 왕비는 명성황후가 유일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을미사변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을미사변은 1895년에 일어났지만 장례식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온 뒤인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나서 명성황후에 대한 복권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 명성황후의 시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의 시신은 불태워져 뿌려졌다고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장례식이 명성황후의 두 번째 장례식이라는 사실입니다.
_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와의 대립, 그 속사정」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