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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04911491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17-04-12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 나타나다, 그러니까 첫사랑이!
2. 두근두근, 콩닥콩닥
3. 치명적인 남자
4. 닿을 듯 말 듯, 닿다
5. 함께 있어야 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
6. 사랑 감별법
7. 찾으러 왔어요
에필로그
외전
작가 후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지저분한 사무실은 벽지에 스며든 담배 찌든 내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진다. 이젠 금연 구역으로 지정이 되어 골초들도 밖에 나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반복되어 왔던 행동 때문에 사무실은 그리 쾌적하지 않았다.
그건 각자의 책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업무에 필요한 간단한 감정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손때가 묻은 펜 라이트(투명도-PT-를 관찰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와 이젠 제 손처럼 사용하는 핀셋과 렌즈가 깨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정도로 오래된 루페(Loupe: 간단히 휴대할 수 있는 작은 형태의 확대경)까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엉망인 책상 중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 자리는 한두 자리도 되지 않았다.
어지럽게 물건이 널려 있는 책상을 팔로 슥 쓸어 한쪽으로 치워낸 지윤이 달력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달력엔 빈 공간이 없을 만큼 각종 스케줄이 색색별로 가득 차 있었지만 오늘도 망할 상사는 자신이 ‘싱글’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일거리를 떠넘기고 있었다.
“또 출장이에요?”
평소라면 집에 가봤자 별달리 할 일이 없으니 군말 없이 일을 처리했겠지만, 이번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출장이라니! 거기에다가 출장지도 비행기로 네 시간은 가야 하는 홍콩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냐? 김 대리, 이번에 출산휴가 낸 거 알지?”
“알다마다요. 여기에 여직원이라곤 나랑 김 선배 딱 둘이었는데.”
지윤이 미간을 좁혔다.
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중 90%가 남자였기에 출산휴가는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인터넷에 보면 다른 업종에서 종사하는 여직원들은 생리휴가도 쓰는 것 같았지만, 지윤에겐 꿈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윤의 상사였던 김정아는 달랐다. 워낙 일을 잘해 사장이 ‘특별 휴가’를 주었다. 물론 만삭이 되고 나서야 겨우 쉴 수 있었으나, 그녀가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해 추가 인원을 뽑지 않았기에 그 일은 고스란히 남은 팀원들이 떠맡게 되었다.
일이 단순한 사무직이라면 열두 명의 팀원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딜러’란 직업은 영업과 출장이 전부였기에 일감을 두 개만 떠맡아도 주말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윤이 입술을 아작아작 깨물었다. 이러다가 과로사하는 건 아닐까?
요즘 들어 부쩍 식욕도 없었고, 밤에 잠을 설쳐 세 시간도 채 자지 못하는 생활이 반복되고 있었다. 의문은 어느새 확신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래, 그럼 같은 종족으로서 뭔가 책임 의식 같은 건 못 느껴?”
평소에 X 염색체를 두 개씩이나 쓸 만큼 여자 사람일 때가 없으니 ‘같은 종족’이 아니라고 우겨볼까?
잠시 생각하던 지윤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말해 씨알이라도 먹힌다면 골백번이고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상사는 이 거친 바닥에서 이십 년이나 구른 베테랑이었다. 그 말인즉, 영업을 이십 년이나 해서 웬만한 말발로는 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른 방법을 강구하던 지윤은 순간 열이 확 오른 건지 도끼눈을 뜨며 이를 딱딱 거렸다.
“이 시기에 홍콩이라니, 말이 돼요?”
“왜 말이 안 되는데?”
“9월이라고요, 9월!”
일 년 중에 가장 바쁜 달이라고 하면 1월과 9월, 12월이겠다. 1월은 연초라고 술판이었고, 9월엔 추석 연휴가 길게 있어 연휴 앞뒤로 정신이 없었다. 12월은 1월과 마찬가지로 술판의 연속인지라 한 달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달이다. 더욱 9월은 앞 달에 있는 여름휴가의 여파까지 있어 정말 정신없이 바빴다.
하필 9월에 장기 출장을 떠밀리듯 가게 된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지윤이 발을 굴린다.
딱딱. 대리석 바닥과 힐이 부딪쳐 괴기스러운 소리가 났지만, 정 부장은 이번에도 역시나 괴변으로 지윤의 불만 따위는 순식간에 잠재워 버리려 했다.
“알아, 9월인 거. 그게 왜 문제가 되는데? 나 같으면 아싸, 땡큐! 하겠다. 출장 다녀와서 휴가 며칠 더 써서 추석 연휴까지 쭉 쉬다 와. 얼마나 좋아?”
불길이 화악 끼친 마음이 순식간에 푸르륵 가라앉았다. 중년 남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귀여운 척 허공에 손을 휘적휘적거리는 것을 보자 전투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후.”
아, 젠장. 그래도 출장은 싫은데. 더욱 휴가를 연달아 붙여 쉴 일정도 안 됐다. 사탕발림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윤은 조금 혹한 얼굴로 물었다.
“규모도 작은데 꼭 가야 해요?”
“알지? 이번에 우리 유색 보석 쪽으로 사업 넓히려는 거.”
지난주에 출장에서 막 돌아온 터라 지윤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다는 듯 마지막으로 토를 달아본다.
“다이아로도 충분하지 않나?”
멍하니 되묻듯 말한 지윤이 스스로 답을 찾은 듯 고개를 저었다.
최근 국내 주얼리 시장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대로 있다간 불경기에 휩쓸려 대한민국 톱 3 안에 든다는 감정소 ‘태양’도 문을 닫게 생겼다.
스스로 답을 찾은 듯 지윤의 표정이 급격히 가라앉자 정 부장은 굳히기 작업에 들어갔다.
“아무리 규모가 줄었다고 해도 아직 홍콩 쇼 무시 못 해. 알지? 가서 거래처도 트고, 동향도 보고.”
“동향이랄 게 있어요? 유색 보석 쪽에?”
신경질적으로 달력을 치워 버린 지윤이 오후에 돌아야 하는 업장을 떠올린 후 시계를 확인한다. 여기서 종로까지 한 시간은 걸릴 테니 슬슬 준비를 해야 오늘 주문량을 제시간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파이어는 파란색, 루비는 암적색, 에메랄드는 깨짐이 덜한 거. 척이면 척이잖아. 만고불변의 법칙처럼 유색 보석 쪽은 변하지 않는다고요.”
주절주절 말하던 지윤이 ‘씁’ 하며 겁을 주는 소리에 후 한숨을 뱉는다.
그래, 포기하자. 나 아니면 갈 사람도 없잖아? 지윤은 텅 빈 자리를 보며 이 사무실에 소속되어 있는 딜러 모두가 현재 전쟁 상태라는 걸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보통 인원의 반이 출장을 떠난다. 그리고 그 반이 돌아올 때쯤 바통을 터치하듯 나머지 인원이 출장을 떠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물어보지 않더라도 일정이 맞지 않을 것이다.
“알았어요, 알았어. 나만 가요?”
“그럼 너만 가지. 거기에 몇 명이나 보낼 필요 있어?”
“방금 전엔 무시 못 할 수준이라면서요! 그리고 혼자서 해외 출장이라니, 위험해서 딜러는 여자 못 써먹는다고, 남자만의 세계라고 말했던 게 어디에 누구더라?”
“그건 사실을 말한 거잖아. 아직도 이 판은 마초 근성이 남아 있다고.”
“으엑, 구닥다리.”
토하는 시늉을 하던 지윤이 작은 가방을 꼼꼼히 살핀 후 자신의 자리 옆에 있는 금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 날짜가 적힌 비닐 봉투를 꺼내 안을 꼼꼼히 살펴본다.
플라워, 디퓨, 트윈, 듀, 선…….
업체명을 일일이 살피던 지윤이 빠짐없이 모두 챙긴 것을 확인했다.
“징징거리는 건 거기까지만 들어주마. 오늘 지원팀에서 티케팅이랑 호텔 예약 내역 가져다 줄 거니까 차질 없이 준비해.”
“네네, 알겠습니다. 아, 근데 감정사 뽑는 건 어떻게 됐어요?”
“요즘 사람 구하기가 어디 쉽나. 밖에선 취업 안 된다고 난린데, 이 바닥은 매일 사람 없다고 난리고. 후~”
정 부장이 걱정이라는 듯 인상을 굳히자, 지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세상에 불행한 직장인은 나만이 아니야. 애써 위안 삼은 지윤은 정 부장이 투덜투덜거리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후 본론을 꺼냈다.
“출장은 대타 뛸게요. 그 대신 인도 출장은 빼주세요.”
“거긴 당연히 여직원은 기각이야. 남자도 위험한 곳에 널 보낼 순 없지.”
“그런 문제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라는 거 알고 계시죠?”
지윤의 눈매가 삐죽 올라가자 정 부장이 실수했다는 듯 손을 휘젓는다.
“그래, 더운 거엔 쥐약이라서 하는 말이라는 거 알아. 그러니까 그렇게 민감하게 굴지 마.”
이래서 여자들은 어쩌고저쩌고 이어지는 말에 지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바닥에서 여자로서 유일무이하다시피 인정받는 것이 출산 휴가를 떠난 김정아 대리였다.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여자가 있었으니, 자신 역시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 지윤이 가방을 챙겨 들며 콧방귀를 꼈다.
그래, 짖어라. 나는 내 일 하련다. 지윤이 샐쭉한 표정을 짓자, 정 부장이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힐끗 본다.
“노처녀 히스테리야? 요즘 까칠하다?”
“제가요? 설마요.”
서른. 아직도 다른 바닥에선 ‘노처녀’란 말을 듣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이 바닥에선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기도 하다.
기분이 나빴지만 익숙해지기도 해서 지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겼다. 괜히 토를 달아봤자 말만 길어질 테니까. 하지만 정 부장은 지윤의 차림을 보며 사소하지만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오늘 데이트?”
“설마요.”
어깨를 으쓱인 지윤이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발을 보았다. 평소라면 절대 신지 않을 하이힐. 걷는 일이 워낙 많았고, 이동하는 거리도 차로는 감당하지 못해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생각하지도 못할 지하철 퀵을 이용하는 일도 많을 정도로 속도전으로 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선 이런 여성스러운 신발보단 발이 편한 운동화를 선호했다.
예전엔 이 여성스러운 신발에 로망을 가졌던 적도 있었는데.
입술을 휘어 삐뚜름하게 웃은 지윤이 의아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 부장을 보며 웃는다. 그 분위기가 고아스러워 정 부장의 어깨가 순간 움찔 떨렸다.
“선 봐요, 저.”
“선?”
“네. 부모님이 갈 때가 됐다고 생각하나 보죠, 뭐.”
자신의 일이라기보다 타인의 일처럼 심드렁하게 말한 지윤이 리드미컬하게 걸음을 옮겼다.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중략]
홍콩 코엑스 1층.
쭉 도열되어 있는 천막 부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눌릴 지경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부스를 차려놓고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다이아몬드는 물론이고 유색 보석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판매하는 도매상들은 부쩍 관람객이 줄어든 것이 걱정이라는 듯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을 아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개중에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들도 간혹 보였다.
차례대로 다이아몬드 부스만 옮겨 다니던 지윤은 제일 끝에 설치되어 있는 천막으로 향하던 도중 전화가 울리자 걸음을 멈췄다. 출산휴가를 떠난 김 대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김 대리님이 어쩐 일이세요?”
지윤이 반가운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 출산 휴가를 떠난 이후로 간혹 연락을 주고받긴 했었으나 최근 산달이 되면서부터는 연락이 뜸해졌던 차였다.
[자기, 지금 어디야? 출장 중이야?]
“네, 이번에 홍콩 쇼 제가 오게 됐어요.”
[고생이 많네.]
그 말 하나로 다른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 준 것이 김 대리였으니까. 이래서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이 편하다고 무던히 생각하던 지윤은 의외의 말에 콧잔등을 구겼다.
[아니, 한국이면 잠시 보려고 했지.]
몇 주일 뒤면 몸을 풀 사람이 갑자기 왜 만나자고 하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지윤은 현재 김 대리가 가장 궁금해할 법한 답을 해주었다.
“모레 들어가요.”
[그럼 다음 주에 볼래?]
“네, 들어가면 연락드릴게요.”
[그래, 그럼 연락 줘.]
통화를 끝마친 지윤이 의아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보았다. 갑자기 이렇게 연락을 한 이유가 뭘까. 거기에다가 갑자기 얼굴을 보자고 하다니. 의아하긴 했지만 지윤은 가볍게 넘겨 버렸다.
“뭐, 다음 주에 만나보면 알겠지.”
지윤이 다시 걸음을 옮겨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세계에서 다이아몬드 연마 시장으로는 가장 큰 인도에서 왔다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윤은 산처럼 쌓여 있는 다이아몬드를 핀셋으로 살살 밀어내며 사이즈별로 분류부터 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5단위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좋아했다. 작아도 0.05캐럿, 0.25캐럿, 조금 크면 0.5캐럿, 1캐럿 다이아몬드. 그걸 시장에선 매직 캐럿이라고 불렀는데 하다못해 0.50캐럿과 0.49캐럿의 가격 차이가 클 정도였다.
사이즈별로 분류한 지윤은 핀셋을 옆으로 기울여 허리 부분을 짚은 뒤 고개를 젖혔다. 형광 불빛을 라이트 삼아 루페로 다이아몬드 안의 내포물을 살핀 지윤이 빠르게 스톤 분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컬러는 G 컬러, 매직 캐럿, 브릴리언트 컷.
주얼리 업체에서 요구한 등급을 다시 한 번 머리로 되뇌던 지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스톤이 튕겨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빠르게 원하는 물건을 고르기 시작한 지윤은 이백 개가 족히 넘는 다이아몬드를 세세하게 분류하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장장 한 시간 동안 허리와 고개만 움직인 지윤은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거리며 남자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회사 주소와 거래 내역을 세세하게 살핀 지윤이 거래를 마친 후 싱긋 웃는다.
「좋은 물건이 많아서 다행이었어요.」
「저도 파리가 날려 죽을 지경이었는데,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인사 몇 마디를 주고받은 지윤이 밖으로 나오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젠 눈 감고도 외우는 정 부장의 휴대전화 뒷자리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무심하게 흘러가던 통화음이 끊기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그래. 스톤 상태는 괜찮아?]
“물건 다 확보했어요.”
[수고했어.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코엑스에 파리 날려요. 덕분에 나야 편했지만.”
[그래, 그럼 남은 시간은 관광이나 하라고.]
업무 보고를 마친 지윤이 끊긴 전화를 보았다.
“관광은 무슨.”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금 당장 호텔로 들어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이고 싶었다.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녔으니, 지칠 법도 했다. 그리고 푹 쉬고, 모레 비행기 시간에 맞춰 느지막하게 일어나 샤워를 하고 공항으로 향해야겠다.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입구로 향한 지윤은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힐끗 보며 걸음을 옮겼다. 여러 장의 팸플릿 중 코엑스 측에서 제작한 팸플릿을 뽑아 든 지윤의 표정이 진중하게 변했다. 2층에 전시 중인 브랜드 설명이 장황하게 되어 있었다.
지윤은 호텔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바꿔 2층으로 향한다. 팸플릿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한 브랜드 때문이었다.
트윈(Twin).
1824년 ‘오로라’라는 브랜드명으로 처음 시작한 트윈은 1891년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인 ‘바론’이 죽자 남은 창업자 ‘리코’가 이를 기려 메인 스톤이 두 개인 디자인의 명칭에서 이름을 따와 ‘트윈’으로 변경했다. 현재는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어 명품 주얼리 중에선 첫 번째로 손꼽히는 회사가 되었다.
그 외에도 네 발 세팅을 유행시킨 티파니나 한국에서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불가리 등등 친숙한 브랜드도 있었으니 한번 죽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발길은 자연스레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지윤이 탐독하는 수준으로 팸플릿을 읽고 있을 때였다.
탁.
“아.”
어깨가 부딪치고,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지퍼를 잠가두지 않아 안에 들어 있던 지갑과 감정 도구가 밖으로 쏟아졌다.
「미안합니다.」
자리에 주저앉아 물건을 주워 담던 지윤은 나른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앞을 보지 않고 걸은 자신의 잘못도 있으니 ‘괜찮아요’ 정도의 답을 하려 했다. 하지만 시선이 참가 스텝이라는 명찰에 적힌 업체명에 닿는 순간 지윤의 입이 꾹 다물렸다.
Twin.
방금 전 가장 호기심을 느꼈던 브랜드의 관계자였다. 지윤의 시선이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때문에 반쯤 가려진 새까만 눈동자를 본 순간 숨이 멎었다.
쿵. 안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추락한 것만 같았다.
설마. 늘 자신의 머릿속을 맴돌던 아이의 모습이 어렴풋 남아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지윤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가득 들어찼다.
“하성준……?”
스스로 그 이름을 꺼내놓고서도 지윤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남자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이런 우연이 가능해?’
볕을 거의 쬐지 않는 생활을 한듯 새하얀 피부는 혈관이 비칠 것처럼 투명했다. 그리고 염색을 한 듯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다. 잘 정리된 눈썹과 그리고 기다란 속눈썹,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검은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적당히 도톰한 입술까지.
아무리 뜯어보아도 기억 속에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과 닮아 있는 모습에 지윤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머물 때였다.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김지윤?”
지윤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맞았다. 십삼 년 전 마지막으로 청한 악수를 받아주지 못해 간혹 아쉬움에 한숨을 쉬게 만들던 그 아이가 확실했다.
어떻게 이렇게 만날 수 있지? 지윤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성준을 바라보다 말고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기가 막히다는 듯.
“멋있어졌다, 하성준.”
지윤의 말에 보통의 사람이라면 보일 반가움 대신 성준은 사람이 민망해질 정도로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날카로운 눈매에 지윤이 어색한 웃음을 지을 때였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인 성준이 들고 있던 지갑을 가방 안에 툭 하고 넣어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리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시선을 옮기는 지윤에게 손을 내민다.
지윤은 자신의 앞에 불쑥 내밀어진 손을 보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를 살폈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부터가 사교성이 좋지 못했고, 가장 친한 친구라 자부하던 자신에게도 연락 한 통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 아이의 현재 모습을 늘 멋대로 상상하곤 했었다. 공부를 잘 했으니 능력 있는 샐러리맨이나 주위에서 선망하는 직업을 가졌을 거라고. 그에 따라 복장이나 외모 또한 각이 잡힌 슈트 정도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신의 첫사랑은 예상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부러 그렇게 한 것처럼 스타일리시했고, 옅은 군청색 트렌치코트와 캐주얼한 바지와 워커는 직장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성준을 보던 지윤은 자신의 앞에서 흔들리는 커다란 손에 정신을 차린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얼빠진 모습을 보여 창피하다는 듯이.
내민 손을 악수하듯 가볍게 붙잡은 지윤은 순간 몸이 훅 하고 허공에 떠오르는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볍게 지윤을 일으켜 세운 성준이 다시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했다.
“왜, 왜?”
부담스러운 시선에 지윤이 말을 더듬었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던 지윤은 또다시 시선이 마주치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원래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람을 보던 아이였던가? 과거 그 어딘가의 기억을 더듬던 지윤은 오감을 자극하는 목소리에 또다시 몸을 떨었다.
“배고프다. 밥 먹을래?”
“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에 솜털이 쭈뼛 섰다. 하지만 성준은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인지 고저 없이 묻는다.
“왜? 밥 먹었어?”
“아, 아니, 안 먹었는데.”
“가자.”
말을 마친 성준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순간 닿아 있던 뜨거운 체온이 사라지자 지윤은 아쉬운 마음으로 손을 보았다.
아쉬워? 도대체 뭐가? 문뜩 깨달은 자신의 감정에 지윤이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릴 때였다. 성준은 답을 듣지도 않은 채 먼저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길쭉한 다리를 움직여 어느새 에스컬레이터 앞까지 간 그의 뒷모습을 보던 지윤이 멍하니 되물었다.
“뭐,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거기에 있었는지도 까마득 잊어버렸던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너, 거기 있었니? 그 어떤 일에도 반응이 없어서 소멸한 줄 알았는데.’
실없는 생각을 하던 지윤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 멈춰 선 성준이 고개만 돌려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치 빨리 와, 라고 말하는 듯이.
성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본 지윤이 실없이 되물었다.
“내가 왜 너랑 밥을 먹어야 해?”
초등학생도 아니고. 유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성준은 타박을 하는 대신 다시 걸음을 옮겨 지윤의 앞에 선다. 고개를 힘껏 들어야 시선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성준은 무척 컸다.
도대체 뭘 먹고 이렇게 큰 걸까? 여자치고 큰 편에 속하는 자신과 머리 하나는 차이 나는 그를 바라보던 지윤이 눈만 깜빡였다.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난 성준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지윤은 느릿하게 달싹이는 입술을 시선으로 쫓았다.
“지금 난 배가 고프고, 오랜만에 만난 너도 반가우니까.”
뭐? 벌어진 입에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입을 떡 벌리는 지윤을 보던 성준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힘없이 툭 떨어져 있던 지윤의 팔목을 감싸 쥐며 말한다.
“두 가지 함께 하는 게 가장 좋잖아?”
씨익.
장난스럽게 웃는 그의 모습에 지윤의 얼굴에 불길이 화악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