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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판타지/환상문학 > 한국판타지/환상소설
· ISBN : 9791104915758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17-12-21
책 소개
목차
제2장 조용한 나날
제3장 창조된 세계Ⅰ
제4장 창조된 세계Ⅱ
제5장 어린놈의 자식이Ⅰ
제6장 어린놈의 자식이Ⅱ
저자소개
책속에서
꺄아아아.
아아아앙.
으아아앙.
잠시 쉬는 시간. 초등학교 일 학년 교실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혼돈.
참을 수 없는 소음에 우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럴 때는 뭔가 집중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 우민은 가방에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꺼내 들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명작 노인과 바다.
그것도 초등학생용 요약본이 아닌, 국내 최대 출판사 중 한 곳인 믿음 출판사에서 나온 완역본이었다.
또다시 특유의 집중력으로 한창 독서에 매진하고 있을 때, 우민에게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이름이 모야?”
우민은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랑 말하기 시러? 소미 유유야.”
여자아이는 인터넷 용어인 ‘ㅠㅠ’를 말 그대로 표현했다. 하지만 우민은 일체 반응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앙!”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화가 났는지 여자아이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우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책에 집중했다.
우민이 반응이 없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한층 커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앙!”
그제야 담임인 남일원 선생이 우민에게 다가왔다.
“소미야, 뚝. 그리고 우민아, 친구가 말을 걸면 대답을 해줘야지.”
우민이 조용히 보고 있던 책을 한 장 넘겼다. 남일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우민아, 선생님이 말하면 들어야지.”
우민은 한 점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눈은 책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남일원이 할 수 없다는 듯 보고 있던 우민의 책을 집어 들었다.
우민이 고개를 들었다.
헉.
남일원이 일순 멈칫했다. 옆에서 울고 있던 여자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우민을 바라보았다.
외모에서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한번 책을 보기 시작하면 주변 소리가 잘 안 들려서요.”
빠르게 정신을 차린 남일원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민아, 선생님한테 거짓말하면 못 써요.”
꺄아아앙.
여기저기서 들리는 아이들의 소란에 교실이 난장판이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심심해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불러도 못 들을 정도의 집중력?
39살.
10년 정도 경력을 지닌 남일원에게는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책을 볼 때나 글을 쓸 때면 종종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한 점의 거짓도 보이지 않는 순수한 얼굴이었다.
휴우.
우민을 보고 있던 남일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아이들을 많이 봐왔다. 보통을 넘어서는 영특, 아니, 영악함을 가진 아이들이 있었다. 이런 아이들을 초반에 잡아놓지 않으면 일 년 내내 힘들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딩동댕동.
쉬는 시간도 끝났다. 여기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알았다. 그럼 우민이는 끝나고 잠시 남거라. 선생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남일원이 뒤돌아 자리로 돌아갔다. 우민은 다시 고개를 숙여 책에 집중했다.
울고 있던 여자아이는 여전히 우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입학식이라 점심시간이 끝난 후 아이들은 모두 하교했다. 오로지 한 아이.
이우민.
생활 기록부를 확인해 보니 편모 가정이었다. 더구나 적혀 있는 주소지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단어, 지하 1층.
대충 집안 환경이 짐작되었다.
우민에게 다가간 남일원이 타이르듯이 말했다.
“우민아,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정직하게 말하면 집으로 가도 좋다.”
도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건가.
수차례의 질문에 우민은 살짝 짜증이 솟아올랐다.
“선생님, 잘못한 게 없어도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나요?”
반발하는 기색을 읽은 남일원이 할 수 없다는 듯 A4 종이 한 장과 펜을 내밀었다.
“그럼 아까 읽었던 책에 대한 독후감을 한번 써볼까?”
남일원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마 펜을 잡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잘못했다며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쓸 것이다.
그게 어린이고, 초등학생 일 학년이다.
지금까지 남일원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랬다.
“네. 선생님.”
우민은 아무렇지 않게 펜과 종이를 받아 들었다. 우민이 약간은 포동포동해 보이는 손으로 펜을 꽉 쥐었다.
제일 먼저 제목과 저자를 적었다.
제목: 노인과 바다.
저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남일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자?
초등학교 일 학년이 쓰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저 책의 제목이라도 맞춤법에 틀리지 않고 쓰면 다행이다.
우민이 쓰고 있는 독후감에는 많이 써본 것 같은 ‘경험’이 묻어나 있었다.
저자까지 적은 우민이 잠시 펜을 멈추었다.
‘이거 지난번 중학생 형들 숙제 대신 해줄 때 썼던 대로 해야 하나… 아니면 정말 내가 느낀 대로 해야 하나.’
우민이 저자까지 쓰고 나서 손을 움직이지 않자, 이제 포기했다고 생각한 남일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민아, 고집 부리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에요. 우민이가 이렇게 계속 억지를 부리면 선생님도 그에 합당한 ‘벌’을 줄 거야.”
그 순간에도 우민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과제도 아닌데, 내가 느낀 대로 쓰자.’
결심을 마친 우민이 펜을 움직였다.
첫 문장을 쓰는 순간 남일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잘하는 게 중요하다.
그 뒤에 쓰인 글에 남일원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잘 태어나는 것이다. 노인이 멕시코가 아닌 미국 월스트리트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했을까?
고통이 반복되는 삶이 진리라면 왜 TV에 나온 강남의 건물주들은 고통이 아닌 만족의 삶을 매일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했다.
거기까지 쓴 글을 보는 순간, 남일원은 알 수 있었다.
이 아이, 뭔가 특별하다.
- 본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