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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25599951
· 쪽수 : 620쪽
· 출판일 : 2015-11-19
책 소개
목차
안식처
급류
재회
해을란
혹한
다시, 겨울
終 - 겨울의 끝
외전外傳 - <나유타, 숨겨진 이야기들>
아시하가 몰랐던 이야기
미유라가 모르는 이야기
너와 나, 우리들의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아시하는 휘청거리면서도 이안을 밀어냈다. 아직 끝이 아니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그가 죽으면 필시 제 영혼도 죽으리라. 죽은 정신을 가지고 육체만 눈뜬 채 살리라. 평생 혼을 사르는 사막에 갇혀 헤매리라.
“당신은 소원을 파기하겠다고 했지만 난 그렇게 못 해.”
아시하는 낮게 속삭였다.
어떤 모습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끝까지 살아.”
당신이 나의 40년을 지켜 주고 싶어 했듯 나도 당신의 40년을 지킬 것이다.
내 삶이 당신에게 가치를 가졌다면 당신의 삶도 내게 가치 있다. 두 번 다시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어도, 두 번 다시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좋다. 우리가 더 이상 서로의 삶에 관여할 수 없다 해도 좋다.
“당신 삶의 이유가 내가 아니어도 괜찮아. 당신의 두 동생이어도, 당신 가족을 죽인 나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고 해도 난 다 상관없어.”
그게 당신을 살게만 한다면.
“계속해서 살아 줘. 그게 내 소원이야.”
“이미 늦었습니다.”
이안이 나직이 대답했다.
“저는 그저 제 삶의 끝에 다다라 황녀 전하를 뵙고자 했습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제 목적을 이뤘습니다.”
가슴이 가파르게 뛴다. 삶의 끝. 족하다. 목적. 이루다. 아프지 않은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스스로 인정하며 받아들인 그의 결말에 가슴이 뭉그러진다. 치받힌 울음에 목이 졸려 와 아시하는 숨을 밭게 뱉었다.
“전하, 안에 계십니까?”
양화 현후가 목소리를 높였다.
“양화 현후가 의심할 겁니다. 이제 문을 열어 주시지요.”
아시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각오하고 왔습니다.”
“……안 늦었어.”
아직은 늦지 않았다. 늦었대도 인정하지 못한다.
아시하는 방을 질러 기둥 사이의 벽을 더듬었다. 숨겨진 균열 너머, 알려지지 않은 길이 있다. 언니를 살렸고 제가 살았던 길이다. 설계도에도 남지 않은 완벽한 비밀의 길. 누가 만들었는지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모를 길.
두드려 공명음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 열었던 위치를 기억하고 있다.
무구한 어둠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린다.
비밀 통로를 등진 아시하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가.”
이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 목적 이룬 거 아니야. 계속 품고 살아. 당신의 마지막에 내가 있을 거라고.”
나 또한 같은 것을 소망하며 살아갈 것이다.
“우린 끝이 아니야.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지금은 내전의 상흔이 깊게 남아 있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나유타에서 상흔을 지워 나갈 테니까. 내전이 과거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이날을 망각하고 살아가도록……. 그래서 언젠가 당신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끔 내가 노력할게. 내전이 과거의 이야기가 되면 우리에겐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지도 몰라. 우리 그날을 기다리면서 살자.”
턱턱 막혀 오는 숨에 허덕이던 아시하가 자리에 허물어졌다. 끝내 무너졌다.
“내가 죽겠다고 할 때마다 당신도 이렇게 아팠니?”
그제야 잔잔하던 이안의 얼굴에 파문이 번졌다. 이안이 저벅저벅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아시하가 소리 죽여 절규했다.
“당신 때문에 난 시시각각 심장이 도려내지는 것 같아…… 너무 고통스러워. 제발 숨 좀 쉬게 해 줘. 당신은 이 마음을 이해하잖아…….”
분명 알고 있을 거다. 이 고통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도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어서라도 나를 살리려 했던 거다.
“황녀 전하.”
아시하를 추슬러 안은 이안이 고요하게 그녀를 불렀다.
“저는 황녀 전하를 만나 참 행복했습니다. 두렵고 괴로웠던 날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제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으로 남았습니다.”
지나고야 알았다. 돌이켜 보니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전부 추억이다. 단 한 조각이라도 잃어버릴까 두렵고 두려워 상자에 넣고 꽉꽉 봉해 버리고 싶은 그리움이다.
“황녀 전하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아시하는 얼굴을 끄덕였다.
“언젠가 제가 돌아올 수 있는 나유타를 만들어 주십시오.”
나의 바람과 그의 바람이 닿아 있으니 반드시 이뤄 내리라.
양화 현후가 문을 흔들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아시하는 이안의 어깨를 밀었다.
“어서 가.”
“눈을 감고 움직이지 말고, 열만 세어 주십시오.”
이별할 적마다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항상 나였었다는 슬픈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지금도 떠나는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시하는 눈을 감았다.
“……하나.”
이안의 손이 아시하를 놓았다.
“둘.”
뒤로 성큼 몸을 물린다.
“셋.”
멀어진다.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다.
“……넷.”
이제 당신 없이 나는 어찌 살까.
“다섯…….”
헤아리던 수가 멎는다. 그가 부드럽게 입을 맞춰 온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시하는 약속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여섯. 머릿속으로 숫자를 마저 세기 시작했다. 일곱. 그리고 여덟…… 여덟…… 여덟…… 세던 숫자가 끊겼다. 수가 하염없이 맴돈다.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 짧은 시간이, 그리고 이 긴 시간이. 이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시간이. 이 행복한 지옥이.
아홉. 입술이 떨어졌다.
열.
아시하는 눈을 떴다.
방이 텅 비어 있었다. 이안은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