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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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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유빙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30007052
· 쪽수 : 504쪽
· 출판일 : 2016-05-25

책 소개

주신 장편소설. "지금 이 순간이 아무것도 아냐? 난 영혼까지 탈탈 털려서 다 뺏긴 기분인데 넌 아무것도 아냐?" 작은 발레리나 희수, 냉정한 소년 나기. 찰나의 영원을 공유했던 그들, 그리고 나기의 죽음. 10년 후 일본을 방문한 희수는 나기와 너무나 닮은 그를 발견한다.

목차

01.
02.
03.
04.
05.
06.
07.
08.
09.
10.
11.
12.

저자소개

주신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강 이남에 살고 있으며 여행보다 골방에서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걸 더 좋아하는 게으름뱅이에다, 남들 기상하는 시각에 잠드는 전형적인 올빼미로 현재 커피 중독과 저혈압을 앓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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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악몽에 눈을 떴다. 희수는 엎드린 채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방의 불은 모두 껐지만 조금 열린 커튼 틈으로 보이는 정원의 불빛이 방 안에 스며들어와 있었다. 멍하니 커튼 틈 사이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며칠이나 지난 건 아닐까?
세 번째의 일본 출장이지만 방문한 건 총 네 번. 처음 일본을 방문한 건 10년 전이다. 그를 만났던 그때 말이다. 홈쇼핑 회사에 입사하고 선배들과 일본 출장을 떠나게 됐을 때 주춤했었다.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 없었고 비행기에서 구토를 했다. 하네다 공항에서부터 열이 났고 한여름인데 심한 독감을 앓아서 응급실에 실려 가는 바람에 출장 내내 호텔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그 뒤로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몸이 피곤한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꿨다. 특별히 어떤 인물이 등장한다거나 특정한 상황이 있는 건 아니다. 천장이 점점 아래로 떨어져 몸이 납작하게 눌리거나, 높은 빌딩과 빌딩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디디는 것 같은 꿈이다. 그리고 방금은 커다란 욕조의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 깊은 땅 속을 헤매는 꿈. 그럴 때면 숨이 막히는 공포에 허우적대다가 대책 없이 눈을 뜬다. 눈을 뜨게 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수억만 마리의 애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자신도 모르게 피부를 쓸어본다.
쿵!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순간 온몸이 굳어지고 진짜로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도둑? 강도?
놀라서 침대에 앉아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건가?
침대 한쪽에 둔 휴대전화를 보니 새벽 4시 10분. 수면은 충분했다. 희수는 조용히 일어나 침대에서 다리를 내리고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정확히 소리가 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대로 가만있기엔 찜찜했다. 선반 위의 물건 같은 게 떨어졌을지 몰랐다. 그렇지만 왜? 어딘가의 창문이 열렸나? 셔츠 위에 가운을 걸치고 끈을 꽉 동여맸다. 맨션으로 들어올 때의 보안을 생각하면 침입자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미션 임파서블’ 같은 영화에서처럼 비행 물체를 타고 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일까? 그럼 낮에 보았던 유우신의 직원? 찰나의 시간에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고민하다가 문으로 향했다. 가운의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고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아 들었다. 반쯤 남은 물병이었다.
희수는 맨발인 채였고, 숨을 죽였고, 무용으로 다져진 몸은 소리 없이 가볍게 움직일 줄을 알았다. 의문의 침입자는 거실에 있었다.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는 회색 양복을 입고 서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어 팔을 움직일 때마다 등의 근육과 견갑골이 두드러져 보였다. 침입자는 엄청나게 컸다. 적어도 키가 190센티미터는 돼 보이고 그녀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넓은 등판에 팔뚝이 무지 두꺼웠다. 긴 다리를 쩍 벌리고 서 있는 모습으로 봐서는 확실히 도둑은 아니었다. 그래서 안심되기는커녕 대적이 안 될 것 같은 덩치에 위축이 되었다.
놀라서 보는데 남자의 손이 움직였다. 물병의 뚜껑을 여는 손이 엄청 컸다. 그녀가 꽉 움켜쥐고 있는 것과 같은 크기인 물병이 요구르트 병마냥 작게 보였다. 그는 큰 손으로 물병을 들고 뭔가를 입안에 넣은 뒤 물을 마셨다. 알약을 먹는 것 같았다. 낮에 보았던 유우신의 직원은 확실히 아니었다.
“저기…….”
용기를 내 한 발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남자가 배를 움켜쥐더니 신음 소리를 냈다. 허리를 접으며 소파 쪽으로 가더니 거구의 몸이 털썩 고꾸라졌다. 동시에 희수의 손에서 물병이 떨어졌다. 소리가 나자 소파에 누웠던 남자가 상체를 들고 소파 등받이 너머로 그녀를 보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소파로 움직일 때 얼핏 보였던 옆얼굴을 포착하고부터 충격이 있었다.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했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모든 감각이 마비돼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얼굴에 꽂힌 동공이 크게 확장된 채로 얼어붙어버렸다.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을뿐더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 내가 잠을 깨웠나 보네.”
남자는 잠깐 놀란 얼굴을 하더니 미간을 찡그리고선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고서는 다시 희수를 봤다.
“놀랄 것 없어요. 잠깐 쉬러 왔으니까.”
충격에 얼어붙어 있던 희수는 뿌예진 눈을 비볐다. 손등으로 양쪽 눈을 마구 비비고 다시 남자를 보았다. 그래도 시야가 맑아지지 않아서 앞으로 다가갔다. 몸이 차가워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더니 숨이 막혀왔다. 커다란 솜덩이가 호흡기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해서 마라톤을 한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쌕쌕 숨을 쉬었다.
“한국에서 온 바이어죠? 나는 야마구치 쇼라고 합니다. 유우신의 직원이니까 안심하고 들어가서 자요.”
모든 감각을 잃고 진공 상태로 멍한 희수의 귓가에 소리가 울렸다. 야마구치 쇼(山口翔)라고? 히가시데 나기(東出凪)가 아니라……. 얼굴이 파랗게 질린 희수의 눈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고였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내려앉았다. 남자를 봐야 했다. 소파에 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잡았다. 양손으로 잡고서 들어 올리자 남자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희수를 쳐다봤다. 희수는 눈물이 차오른 눈을 크게 뜬 채로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폈다. 닮았다. 너무나 닮았다. 그렇다는 건 다르다는 의미도 되었다.
“호, 혹시…… 혹시…….”
자신의 잠긴 목소리를 듣고서야 진공 상태가 깨졌다. 비로소 감각이 열리고 현재의 상황이 인식되었다.
“히가시데 나기…….”
그건 언어가 되어 나오질 못했다. 충격에 억눌린 입술이 제대로 움직여주질 않아서다. 단지 소리뿐이지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난 10년 동안 결코, 절대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한 이름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너무 아파서, 혀끝에 담는 순간 죽을 것만 같아서…….
뺨으로 눈물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다시 흐려진 시야에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담았다. 히가시데 나기를 닮았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얼굴, 10년 전 그는 마른 얼굴에 남자다운 골격을 갖고 있었다. 두드러진 광대뼈와 곧고 높은 콧날, 날카로운 턱선. 두껍고 짙은 눈썹에 쌍꺼풀 없이 옆으로 긴 눈, 그리고 적당한 두툼하면서 활처럼 휘어진 섹시한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눈빛은 매서웠고 과묵했으며, 다정하기보단 거칠고 저돌적이라서 밤의 폭풍 같은 남자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해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그만…….”
남자는 신음 소리를 내며 말끝을 흐리더니 배를 움켜잡고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보니 검은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으며 피부도 축축하고 차가웠다. 자신의 아픈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얼굴을 돌렸다. 질끈 감았다 뜬 남자의 눈은 카펫과 안락의자 사이 허공을 향해 있었다. 자신 안의 고통을 관조라도 하는 듯이 처연했다. 같은 눈매인데 남자의 눈은 나기와 같은 공격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광대뼈와 턱선도 그렇게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다. 야생마처럼 거친 나기에 비해 차분하고 정제된 분위기, 성숙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같은 얼굴인데 다른 느낌……. 이럴 수도 있는 걸까?
“들어가요. 나도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
살짝 몸을 외로 튼 남자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는 꾹 눌러도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희수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로 남자의 표정과 모습을 살폈다. 명치 부위를 큰 손으로 움켜쥐고 있어 양복 상의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소파 끝에 불안하게 앉은 허벅지가 팽팽하게 당겨져 금방이라도 바지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남자의 허벅지는 희수의 허리와 맞먹을 정도의 굵기였고 쇠파이프로 내리쳐도 끄떡없을 정도로 탄탄해 보였다.
“위경련인가요?”
충격과 눈물에 잔뜩 쉰 목소리가 차분히 흘러나왔다. 희수의 목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쿵 내려앉았던 심장에 비수를 꽂는 고통이 더해졌다. 코끝이 달아오르고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너무나 그리웠던 얼굴이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날카로운 고통이 심장을 관통하는 느낌에 숨이 턱 막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시선을 내렸다.
“누, 눕는 게 좋겠어요. 잠깐이라도…….”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요. 약 먹었으니까.”
남자의 저음에도 울림이 있었다. 목소리마저 나기와 닮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나기의 목소리가 생각나지 않는다. 처음엔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히지 않더니 이제는 아무리 기억하려고 애써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와 사진 한 장 찍어두지 않은 걸, 그의 목소리 하나 남겨두지 않은 걸.
희수는 쓰라린 가슴을 안고 일어나 소파 끄트머리에 쿠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마가 위염을 앓고 있어서 가끔 이렇게 아파하곤 하셨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아요. 진정될 때까지 누워 있어요.”
남자는 고통의 신음을 낮게 흘리더니 몸을 움직였다. 한 손은 아픈 쪽을 움켜쥐고서 한 손으로 양복 상의를 벗으려 했다.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거들었다. 양복은 기성복이 아니라 고급 원단으로 숙련된 재단사가 만든 옷 같았다. 남자의 옷에선 몽환적인 느낌의 묵직한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소매에서 남자의 팔을 빼내다가 우람한 어깨에 손등이 살짝 스쳤다. 그때 남자의 입에서 밭은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다시 통증이 시작된 모양이다. 느슨하게 묶인 넥타이를 당기는 남자의 움직임이 거칠었다. 희수가 놓은 쿠션에 머리를 기대 몸을 눕히는 걸 보고서 희수는 양복 상의와 넥타이를 정리했다.
“일본어가 매우 능숙하네요.”
남자는 와이셔츠의 맨 위 단추 두 개를 풀었다. 드러나는 목덜미도 번들거리는 걸 보니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것 같았다. 내색하진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통증이 꽤 심한지도 몰랐다.
“공부를 좀 했어요.”
“취업 때문에?”
“그냥…… 일본어를 알고 싶어서요.”
10년 전, 히가시데 나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희수는 믿지 않았다. 충격으로 멍했다가 정신 차리고 미친 듯이 자료를 모았다. 그가 살아 있을 법한 증거를 찾아서 신문과 보도 자료를 뒤졌다. 하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읽지 못하는 정보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조급함을 누르고 사전을 뒤져가며 겨우 그의 아버지 이름을 알게 됐다. 일본 구글에 히가시데 유이토(東出結人)를 검색했다. 일본의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야쿠자 간의 분쟁으로 히가시데 유이토의 아들 히가시데 나기가 서울에서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기 시작하자 몸이 아팠다. 먹을 수가 없었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당연히 수업의 집중도도 떨어졌고 자신이 발레를 왜 하고 있는 건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삶의 의지가 사라져버린 거다.
욕실로 간 희수는 대야를 찾아 뜨거운 물을 담고서 수건과 함께 들고 나왔다. 거실로 돌아오니 남자는 와이셔츠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희수가 놓은 쿠션에 머리를 눕히고서 한 팔로는 눈을 가리고, 다른 손으론 명치 부위를 움켜쥐고 있었다. 길고 넓은 소파를 꽉 채우는 거구의 존재감에 조금 압도되었다.
“복부를 따뜻하게 해주면 좋아요. 셔츠를 조금 올려볼래요?”
대야를 바닥에 놓고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 물기를 꼭 짰다. 남자는 희수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꼼짝도 않고 있다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리고서 희수를 쳐다봤다. 남자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춥진 않아요?”
희수는 따끈한 수건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일부러 피했다. 보면 다시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잘 참네요. 저희 엄마는 응급실로 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시곤 했어요. 내장을 비트는 것처럼 아프다던데…….”
말과는 달리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선은 커다란 손이 하나씩 풀어가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향해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나기 생각뿐이었다. 그가 살아 있기만 한다면 뭐든 하겠다고, 발레도 포기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하겠다고 기도한 10년 전처럼 말이다.
열여섯, 그땐 모험심으로 가득했고 세상 모두가 내 편이라고 생각해서 겁이 없었다. 가난하지 않았고 예뻤고 재주도 있었으니까. 어린 나이엔 그 정도가 큰 행복이고 행운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처투성이다. 발레를 포기해야 된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는 패닉 상태였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죽고만 싶었다. 그 고통을 감내하고 지금의 커리어우먼이 되기까지는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이때에 나타난 이 커다란 폭탄은 무슨 의미일까? 하늘에서 보고 있던 그가 점점 잊혀가는 게 서운해 자신을 상기시키려는 걸까? 그렇다면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주고 싶다. 잊혀가는 만큼 그의 빈자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더더욱 깊이 새겨지고 있으니.
넋을 놓은 채 있던 시야에 구릿빛 근육으로 울퉁불퉁한 남자의 상체가 들어왔다. 제대로 단련돼 있는 복근, 치골 근처에 세로로 그어진 한 뼘 크기의 상처와 함께. 다시 몸이 굳어진 희수는 상처에 시선을 뺏겼다.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혹시 10년 전 교통사고로 얻은 상처가 아닐까?
“맹장 수술 자국입니다.”
마치 희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대답했다.
“2년 전에 한 수술인데 흉터가 보기 흉하죠?”
뭘 기대한 걸까. 그는 죽었다.
희수는 말없이 따뜻하게 데워진 수건을 접어 남자의 복부에 올려놓았다. 수건 위로 손을 올려 마사지하듯 조금 눌러주며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많이 아프면 병원엘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아닙니다.”
조금 식은 수건을 거둬 다시 뜨거운 물에 담갔다. 물기를 꼭 짠 뒤 남자의 복부에 올리자 남자는 아까와는 다른 신음 소리를 내었다.
“뜨거워요?”
남자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누구한테나 이렇게 친절합니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남자를 보았더니 농담인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통증으로 미간이 좁혀지는 걸 보고서 가볍게 답했다.
“아픈 사람한테는요.”
희수는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수건 위로 남자의 복부를 살짝 누르며 주물러주었다. 엄마의 배는 수건 없이 맨살에 해주곤 했었다.
“여긴 유우신의 직원들이 상시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인가 봐요?”
“불쑥 들어와서 쉬는 데 방해가 됐군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 부러운 회사다 싶어서요.”
희수는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그렇게 십여 분쯤 흘렀을까, 다시 수건을 데워 남자의 복부 위에 올려놓고는 남자를 쳐다봤다.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고 이마의 식은땀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인지 희수를 보는 눈빛이 새삼 달라진 것 같았다. 마음을 꿰뚫을 듯이 직구로 응시하는 눈빛이 진지했다. 순간 희수는 그 눈에 홀려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눈은 노골적인 욕망을 뿜어내던 나기의 눈과 닮아 있었다. 척추를 타고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 피부가 까슬까슬 예민해지는 기분, 죽어 있던 세포가 깨어나는 느낌. 10년 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열기였다. 자신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빨려들어가게 하는 블랙홀 말이다. 나기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걸까?
남자의 변화가 희수에게 전달되었듯이, 희수의 예민한 변화를 감지한 남자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나, 나이를 물어봐도 될까요?”
혼란 가득한 그녀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뻗어왔다. 상체를 일으키지도 않고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감아 당기더니 그대로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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