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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30007069
· 쪽수 : 416쪽
· 출판일 : 2016-05-18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01
02
03
04
05
06
07
08
에필로그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병원 옥상 휴게실까지 따라 올라가자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도 아닌데 낯선 사람을 따라오다니 미쳤다. 이 남자가 정신병자나 성범죄자면 어쩌려고! 정훈과 관련이 있다면 분명 출판사 사장이나 적어도 편집장을 만나지, 일개 대리인 그녀를 찾아올 리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때문에 그녀의 입이 긴장으로 다물렸다.
“무슨 용건이죠?”
남자는 꽤 지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마스크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딱 봐도 180cm가 넘는 키는 위협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그녀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결단코 그녀는 그를 본 적이 없다. 이 정도 얼굴을 기억 못 한다는 건 안면 인식 장애를 가진 것이다.
“빨리 좀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청명한 봄 날씨와 다르게 옥상은 간헐적으로 찬바람이 온몸을 때리고 지나갔다. 그에 따라 그녀의 긴 머리는 이리저리 헝클어지고 얇디얇은 블라우스가 나풀거렸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옥상까지 부른 그는 천성이 느긋한 사람인지, 아니면 할 말을 마음속으로 정리라도 하는지 입이 무겁기만 했다.
“혹시 카드 영업 하려고 온 거 아니죠?”
가끔 아버지 병문안을 가면 별별 사람이 다 있다. 속옷 파는 사람, 카드 영업 하는 사람. 하물며 몰래 죽 파는 사람까지.
남자가 헛기침을 하자 윤아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나마나 처음 하는 일일 테고 입도 잘 안 떨어질 것이다. 딱 봐도 적성에 안 맞아 보였다.
“저기요,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영업하다 걸리면 혼나요.”
느긋한 성격도 아니지만 남의 묵언 수행을 옆에서 지켜볼 만큼 참을성 강한 성격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만 해도 정훈의 교통사고 소식을 회사에 보고해야 했고, 간병인도 구하고, 또 영화감독 스케줄도 조율해야 했다. 이렇게 할 일이 우라지게 많다고요!
“박도윤입니다.”
그녀의 눈은 ‘그래서요?’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박가영 씨 오빠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치 이 말이면 어린아이도 알아먹을 수 있는 설명이라는 듯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미간만 좁혀지게 만들 뿐이었다.
“박가영 씨 오빠요?”
남자의 불친절한 힌트에 그녀의 머릿속은 열심히 검색 엔진을 돌렸다. 최대한 눈에 힘을 주며 집중력을 발휘한 그녀는 순간 정훈의 여자친구 이름이 ‘가영’임을 머릿속에서 건져냈다. 그와 관련해 유추해낼 수 있는 몇 가지 추론 또한 머릿속에 속속 떠오르고 있었다.
“아……!”
답을 알았으나 딱히 다른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속으로는 ‘젠장!’이 1초 간격으로 발사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와 정훈이 애인인 줄 알고 뭔가를 물으러 왔든가, 아님 교통사고에 대해 궁금해서 왔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녀에게 물을 필요가 있나? 그것도 옥상까지 올라와서? 뭔가 2% 부족한 이 상황 설명이 영 개운치 않았다.
“표정을 보니 이런저런 설명 필요 없겠군. 그 남자, 가영이와 결혼시킬 작정입니다. 그러니까 그쪽이 물러나주었으면 하는데…….”
흑요석만큼이나 까만 그녀의 눈이 깜빡임을 잊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머리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듯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결혼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는 제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했다. 오늘 그의 손수건은 여동생이 다 써버렸으니 말이다.
“결혼이요?”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윤아는 잠시 그의 말에 대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말을 초면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 남매는 아무래도 쌍으로 정신이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청혼을 안 받아주면 같이 죽자는 여자나, 결혼을 떼쓰는 여동생 소원을 들어준다고 그걸 밀어붙이는 오빠나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경황이 없어 상황 설명을 다 듣지 못하고 그녀에게 온 모양 같은데 그걸 감안해도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지금 어떤 심정인지 잘 알지만 원하는 게 있으면 최대한 보상해주겠습니다.”
여자가 충격에 빠졌는지 반응이 없자 도윤의 마음은 더욱 불편해졌다. 이런 말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여자보다는 여동생이 중요했다.
“그걸 지금 저에게 말하는 이유가 뭐죠?”
그가 생각했던 이미지의 여자였다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런 남자를 만나는 여자답게 좀 더 계산적이고 좀 더 속물적이고 가벼운 여자였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까만 두 눈은 고집스럽지만 맑아 보였다. 그리고 상처를 받은 듯한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 한 품에 안았을 만큼 작은 체구처럼 마음 또한 여리고 약할지도. 그는 충동적인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최정훈과 해결을 봐야 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 동생이 미혼모가 되는 건 막아야 하니까.”
그의 말을 받아치려고 숨을 크게 들이켠 윤아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를 바라보아야 했다. 충격적인 그의 말에 뿜어내려고 폐에 가득 찼던 공기가 순간 바람 빠지듯 피시식 빠져버렸다. 뭐라? 미혼모?
“잠깐만요. 지금 그쪽 여동생이 임신했다고요?”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충격에 빠진 듯했다.
아마 그놈은 이 이야기까지 하진 않은 듯했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을지도.
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정말 임신 맞아요?”
그녀가 재차 물었다.
“의사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교통사고로 아이가 유산될 뻔했습니다. 상당히 심적으로 불안한 상태이기도 하고. 그러니…….”
“이 개새끼!”
그녀는 낮게, 그러나 힘주어 중얼거렸다.
“동감이야.”
윤아는 더 이상 남자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뒤돌아 빠르게 병실로 내려갔다. 정훈이 특급 작가든 나이롱환자든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다. 가서 모가지를 흔들어서라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어봐야겠다. 이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정훈은 정말 인간 말종 중에 상말종이었다. 어떻게 이런 걸 그녀에게 부탁할 수가 있나.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그녀는 정훈의 목을 비틀 손가락 운동을 끝냈다.
병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윤아는 두 손으로 힘껏 정훈의 목을 압박하며 흔들었다. 충격으로 그의 상체가 흔들려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뼈가 아작이 나도 시원찮을 인간이었다.
“도대체 켁…… 켁, 왜 이래…… 커피 없으면…… 아무 거라도…… 켁켁.”
“이참에 아주 목뼈까지 금 가게 만들어주마!”
정말 병실만 아니라면 온갖 욕을 다 퍼부어도 시원찮을 선배였다. 그녀는 이를 사리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바스라트리며 말을 내뱉었다.
“임신시켜놓고 모른 척 내빼? 어디서 똥 싸고 누구한테 엉덩이를 들이밀어?”
“무슨 말이야. 임신이라니? 누가? 가영이가?”
“누가 또 있어? 네가 카사노바야?”
“가영이가 임신했다고?
얼마나 놀랐는지 갈비뼈에 금이 갔던 것도 모를 정도로 정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배가 몰랐다니 말이 돼? 그래서 나보고 가보라고 한 거 아니었어? 뒤처리 반으로?”
뭔가 격한 반응이나 변명거리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올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정훈은 말이 없었다. 그보다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을 뇌가 씹어 먹느라 과부하가 걸린 넋 나간 표정과 비슷했다.
윤아는 호흡을 가다듬고 가만히 정훈을 지켜보았다. 충격을 받은 척하는 저 표정이 연기라면 지금 이 순간 천부적인 재능이 또 하나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결혼하자고 한 거구나.”
정훈이 넋 나간 듯 낮게 중얼거렸다.
“어떡할 거야? 임신 4개월이래. 그쪽에서는 당장이라도 선배 목에 목줄을 채워서라도 결혼식장에 끌고 들어갈 생각인가 본데 어쩔 거냐고.”
아주 잠깐 말을 섞어본 남자지만 능히 그러고도 남을 오빠처럼 보였다. 왜 안 그러겠는가. 그녀라도 동생을 임신시키고 토낀 놈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남자가 왜 그리 그녀에게 말을 꺼내기 주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내 동생 임신했으니 당신이 떨어져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랑 가영이는 무사하고?”
그래도 걱정은 되는지 그는 충격을 다 받아들이기도 전에 가영과 아이의 안부를 물었다.
“유산될 뻔했대.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여자 쪽 오빠한테서 들은 얘기가 전부야.”
윤아가 팔짱을 끼며 노려보았다.
“그만 노려봐. 나도 몰랐다니까.”
“그래서?”
“생각 좀 해보자. 도대체 언제 임신했지?”
의미 없는 질문인 것을 알면서도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했다.
“당사자가 직접 가서 알아봐. 유산될 뻔했다면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닐 거야.”
“그럴 리 없는데…….”
정훈은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두 눈을 감았다. 4개월이라면 호텔인가? 아니면 그녀의 오피스텔? 도대체 언제 실수를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으며 손으로 눈두덩을 덮었다.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머리는 사실이 아닐 거라 부정하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겠지. 즐길 때 준비물 좀 잘 챙기지 그랬어.”
윤아는 이제 빈정거리며 정훈을 비난했다. 물론 조금 전 정훈이 몰랐다는 사실을 정상 참작해 등급을 ‘개새끼’에서 한 단계 격상시켜 ‘나쁜 놈’으로 올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몰랐다고! 내가 알았다면…….”
“나한테 변명할 필요 없어. 지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휠체어를 가지고 오는 것과 선배 스케줄을 최대한 뒤로 빼보는 거니까.”
“잠깐, 생각 좀 하고. 난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혹시 4개월이면 아이를 지울 수…….”
“닥.쳐.”
“정말 결혼밖에 방법이 없다고?”
그의 질문을 무시한 채 윤아는 홱 돌아서서 휠체어를 가지러 병실을 나갔다. 아무래도 사고 친 정훈 때문에 한동안 자신이 바빠질 듯한 불길한 예감에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어쩌겠는가, 월급은 그러라고 주는 것인걸.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병원 로비를 나서는 윤아의 걸음걸이는 꼬부라진 노인마냥 축 처지고 느렸다. 핵폭탄을 어떻게든 꾹꾹 눌러 땅속으로 다시 집어넣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말이 작가 담당자지 정훈의 개인 몸종이나 다름없는 윤아는 갑자기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져 울컥했다. 정작 작가가 꿈인 그녀는 글을 쓰지 않고 생활비에, 사회생활에 치여 살고 있고, 이 시대의 최고의 한량이 목표인 정훈은 작가가 되어 있었다. 펜을 놓은 지 오래되어 이제는 자신의 꿈이 작가였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입맛이 유독 쓴 건 아직까지 아무것도 못 먹어서 그럴 것이다. 아니, 지금 이 사실을 상사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사약 한 사발은 먹은 듯한 기분이었다.
“시리즈 3편 기획이 지연되어 관련자들 날이 서 있는데…… 사고에 아이까지. 뭐라고 그 사람들을 달래냐고.”
마감 스케줄이 뒤로 밀리면 출판사가 또 한바탕 그녀만 볶을 것이다. 유명한 작가님 심기를 직접 건들지 못하니 그녀라도 쪼아야 정훈이 움직일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 상념에 파묻힌 윤아의 팔을 잡아당겨서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랐다면 미안하군.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또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충격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겠지.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이 여자는 다른 남자를 만나면 되지만 그의 동생은 생명이 걸린 문제였다. 그는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잘라버리기로 했다. 그러면서 혹시 눈물 자국이 있는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울지는 않았군.’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했으면 하는데.”
“그쪽과 할 말 없어요.”
‘그들도 성인이니 당사자들 문제는 당사자들끼리 해결하게 내버려두세요, 제발.’
이렇게 말하고 싶으나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아마 여자의 오빠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그녀를 찾아왔겠지.
“최정훈이라는 남자와 정리를 해주면 그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하도록 하지.”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산데? 물론 상대가 남자 쪽 어머니고 그녀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닌 게 아쉽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 남자, 보자보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네.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만나자 보상을 못 해줘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보험 회사 다니세요? 아까부터 보상, 보상 얘기하는데 어떻게 보상해줄 건데요? 다른 남자라도 물어 와주시게요? 아니면 돈으로?”
“……원한다면 둘 다.”
예의가 없는 짓인 줄은 알지만 그녀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자신감 넘치는 이 남자, 패기가 아주 하늘을 찌를 태세였다. 아무래도 이 남자, 정훈과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재수가 없는 부류일지도. 여동생 문제로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그걸 감안해도 너무 무례했다.
“얼마요? 1억쯤 주시게요?”
“…….”
“왜요? 너무 많이 불렀나요?”
그가 아무런 말도 없자 윤아는 여동생의 임신 문제로 제정신이 아닌 남자를 조금은 불쌍하게 살펴봤다. 한 톨도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과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양복으로 보건대 적어도 한 깔끔 떠는 남자이거나 그 이상을 넘어 완벽주의자에 보수주의자임이 틀림없었다. 서른 초반에서 중반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표정이 칡뿌리 열 개쯤 입에 물고 사는 게 일상처럼 찡그려져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사는 게 재미없는 모양이다.
“제가 지금 좀 바쁜데, 가도 될까요? 그리고 부탁은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윤아는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더 이상 그와 말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그를 내버려두고 병원을 빠져 나갔다. 저 남자가 보태주지 않아도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정훈의 뒤치다꺼리로 터질 지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