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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91130662596
· 쪽수 : 468쪽
· 출판일 : 2025-01-17
책 소개
목차
1부
2부
감사의 말
리뷰
책속에서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진 않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꼭 여름날의 과수원이 떠오른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나무 아래 공기는 서늘하고 나긋했다. 아버지와 나는 손을 잡고 맨발로 과수원을 걸어 다녔다. 높게 자란 풀 사이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노라면 농익어 떨어진 버찌 열매가 발바닥 아래에서 터졌고, 그럴 때마다 어쩐지 느리고 푸르른 땅의 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수원 끄트머리에 다다르면 아버지가 나를 번쩍 안아 과수원의 경계인 돌담 위로 올려주었다. 그러면 눈앞에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다. 둥그스름한 산기슭을 향해 들갓 밭이 한없이 뻗어나갔고, 태양은 구름 뒤에서 희게 빛났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짜릿한 슬픔과 엇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이후로도 탁 트인 공간이나 쓸쓸한 경계 지역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때와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익숙한 세상의 고독한 끝자락에 존재하는 그런 느낌.
에드메의 부모님이 이곳에 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에세이 주제가 아닌 현실에서, 다른 밸리의 방문을 승인받을 수 있는 사유는 사별뿐이었다. 산 너머 20년 이후의 삶을 사는 동부 밸리의 세상에는 에드메가 죽고 없는 게 틀림없었다. 피라 부부를 알아봤던 그 순간, 나는 그들이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마음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이제는 죄책감이 들었다.
“심사 프로그램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저울질하는 일이라고 네가 그랬잖아……. 만약 그게 네 직업이 된다면 아마 너는 슬픔에 점점 익숙해질 거야. 마치 슬픔이라는 감정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너희 아버지 일이 있고 나서 너희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일을 너는 겪지 않도록 너를 보호하려고 노력하시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