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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30815619
· 쪽수 : 156쪽
· 출판일 : 2020-02-15
책 소개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풀들은 눈물방울 같은 이슬을 달고
아침 / 떨림에 대하여 / 버드나무 유르트 / 느티나무와 청동거울 / 라면이라는 곡선 / 흰 말채나무의 시간 / 벤치 위의 날들 / 새들의 수렁 / 공작새는 어떻게 날아오는가 / 거미집에 대한 짧은 견해 / 아스팔트 위의 고양이들 / 분홍 돔 / 달팽이
제2부 내장처럼 질긴, 양귀비꽃처럼 허무한
바람은 / 호수 / 수선화꽃 한 다발 / 달걀 / 공원 거주자 / 구름의 일가/ 식물의 감정 / 일기예보 보는 사람 / 동토 일기 / 장미꽃 폭설 / 겨울 호야 / 무의도(舞衣島) / 토가족 남자 / 꽃 피는 쿠션들
제3부 우뚝 멈춰서는 적막의 이름들
먼 어머니 / 아버지의 이름으로 / 사과나무들은 침묵하고 / 나의 바그다드 카페 / 꽃 핀 자귀나무 / 저녁의 행보 / 산북 마을, 그 먼 / 산현리 / 구르메 / 퇴적암 / 국수와 비 / 매화꽃과 사내 / 포플러 상가(喪家)
제4부 우리는 종종 밤늦도록
아침 물결들의 호수 / 동백 엔딩 / 꿈에 울다 / 청보랏빛의 말 / 오동꽃 / 연성(蓮城) / 새와 구두 / 겨울 구근 / 할머니의 밭 / 이명 / 주홍집시나비 / 침몰 / 밤의 산들공원 / 껍질의 시간 / 가든, 무릉도원
제5부 아직 깨어 있는 마지막 새들을 위하여
축제 / 여의도 비가(悲歌) / 숲속의 독서 / 엄마들의 봄 / 목련 나무 아래로 / 군들 / 외가가 있던 마을 / 수원엔 비가 내리고 / 장미향의 욕조 / 푸른 호랑이 눈 / 광장에서
■ 작품 해설:이원시, 죽음을 예각하는 견성의 언어 - 손남훈
저자소개
책속에서
최기순 시인의 시는 이원시로 쓰여졌다. 그의 시는 압도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들이 중추를 이루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대상 사물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각적인 시선으로 봄으로써 대상에 대한 감응을 길어 올리고 있다. 다른 많은 시편들이 직관의 상상력을 추종하는 데 바쳐져 있는 데 비해, 최기순 시인의 시편들은 ‘직관의 신화’를 의심하고 그로부터 한 걸음 거리를 둠으로써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의 특징들은 단순히 시작 방법론이나 시의 미적 구성의 측면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최기순 시집의 전반적인 세계관과 경향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중략)
그렇다면 이제 시인은 왜 죽음에 집중하는지를 따져보도록 하자. 죽음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으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문제는 우리의 삶의 양식 안에서 죽음은 늘 소외되어 있다는 점이다. 문명사회는 마치 인간 존재의 불멸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환상8하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은 더욱더 고립되는 양상을 자주 보이고 있다. 특히 모든 것이 상품으로 대체되는 현대인의 삶의 양식에서는 상품의 지속적인 생산과 그 생산된 상품의 계속되는 소비를 통해 불멸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인은 “도시”, 이마를 쓸어주고 얼굴을 묻게 할 뻔한 “버드나무를 둥글게 휘어” 만든 “전통가옥 유르트”와 구별되는 그곳을 낯설고 차가운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시인은 유목민과 마찬가지로 “유르트”를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도시”를 “낯선 곳으로 낯선 곳으로만 흩어지”게 하는 곳으로 여긴다. 온통 죽음뿐인 세상에서 오히려 죽음을 배제하는‘ 낯선’ 곳이 바로 문명사회를 상징하는 “도시”인 것이다. 최기순 시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떠돎과 고립의 자세는 죽음이 배제된 공간에서 오히려 죽음을 감각하는 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론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공원 거주자」 「구름의 일가」 「동토 일기」 「저녁의 행보」 등 여러 시편에서 편재(遍在)된 배제와 고립, 떠돎의 상황들은 궁극적으로 상품물화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반성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촉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남훈(부산대 교수·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중에서
흰 말채나무의 시간
유리창마다 성에가 흰 말채나무를 키운다
한파가 몰아칠수록 창문의 말채나무는 숲을 이루고 온종일 켜놓은 화면에선 물결이 솟구치다가 순간 얼어붙는다
국경의 가시 철조망 낙화처럼 물결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소년의 맑은 눈동자에 큭! 예기치 않은 울음이 터지지만 그것은 의자를 보면 주저앉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의 말들은 고삐를 매지도 않았는데 움직임을 멈춘 채 굳어 있다 말들을 어서 달리게 해야 해 단단히 고삐를 틀어잡고 채찍을 휘둘러보지만 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마 잊혀져가는 스스로의 발굽 소리를 듣는 듯하다 다시 채찍을 들어 말들 대신 등줄기를 후려쳐 본다
턱을 괴고 앉아 흰 말채나무나 바라보는 날들이다 유리창을 꽉 채운 흰 말채나무 가지들처럼 모든 것은 얽혀버린 채 굳어 있다 서로 완강하게 소외되어 얼어붙은 눈동자와 혀가 풀릴 때까지 이 빙하기를 견뎌야 할 것이다
산북 마을, 그 먼
키 큰 전나무 숲 군사기밀도로가 전부인 마을은
겨울이 깊을수록 흰 산이 우뚝 솟아올랐다
시렁 위 싹을 틔울 감자들 아직 눈이 깜깜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고모들 구부러진 못처럼
박혀
양말을 깁고 가마니를 짜고
무채와 말린 산나물을 섞어 밥을 짓는 어머니는
철산 겨울이 맞닥뜨린 범의 숨소리 같다고
마당의 빨래들 뻣뻣하게 언 채로 눈을 맞고
눈송이들이 창호지에 보푸라기처럼 달라붙는 밤
할아버지의 느릿한 옛이야기는
추녀 끝 고드름을 단단한 직선으로 내려 키운다
등불 건 툇마루까지 눈이 쌓이고
소맷부리 해진 옷을 머리맡에 두면
꿈의 장막이 열리면서
가오리연이 새하얀 꼬리를 흔들며 유영하고
눈의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은하수를 흩뿌리며 달아났다
참새 떼가 새파란 공중을 향해
언 나뭇가지를 차고 오르는 아침
눈부신 햇살에
시리고 맑은 향의 구슬들이 챙챙챙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