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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30817910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21-05-3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제1부 푸른 유리 필통의 추억
길두 아재 / 별똥별 / 적자(嫡子) / 깃발 / 앞돌 / 동박새 / 어린 손님 / 푸른 유리 필통의 추억
제2부 무화과가 익는 밤
태몽 / 어장(漁場) / 애기똥풀 / 단층애(斷層崖) / 택배 할매 / 어머니의 지팡이 / 열무김치 담근 날 / 그녀가 대답해주었다 / 무화과가 익는 밤
제3부 달팽이의 꿈
매발톱꽃 앞에서 / 달팽이의 꿈 / 암매미의 죽음에 부쳐 / 어떤 문상(問喪)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오빠 생각 / 피아노가 있던 자리 / 음력 팔월 스무나흗날 아침에 / 놀란흙 / 휘파람새
제4부 동백꽃 피는 소리
새를 찾습니다 / “우린 날 때부터 어섰주” / 그의 누이가 되어 / 테왁, 숨꽃 / 새 / 하늘말나리 / 숨은 꽃 / 종이컵 그리기 / 거리의 성자들 / 동백꽃 피는 소리
제5부 조율사
교장 선생님과 오동나무 / 감나무집 입주기(入住記) / 15 극장 / “굿바이, 제라늄!” / 저녁의 악보 / 흔적 / 간종(間鐘) / 노랑머리 새의 기억 / 샤갈의 마을에 들다 / 조율사(調律師) / 다시 찾은 유년의 몽당연필
해설 : 대상애와 가족애의 화음 - 맹문재
저자소개
책속에서
감긴 눈꺼풀 속으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설핏 눈을 떴을 때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온 세상이 은빛이었다. 나는 아재의 바지게에 담겨서 된서리가 모다기로 쏟아져 내리는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멀리 외가가 보였다. 뒤꼍 대숲도 아재가 목말을 태워 올려주던 감나무도 마당도 꿈결인 듯 고요했다. 여우도 부엉이도 잠에 빠진 듯 산길엔 싸락싸락 갈잎에 서릿발 부딪는 소리만 났다.
오늘 밤에도 무서리가 내린다. 서랍 속 사진을 꺼내어 본다. 뚜벅뚜벅 시간을 걸어 나온 길두 아재가 그날처럼 나를 깨운다.
“자야, 니, 또 와 우노?” (「길두 아재」)
잘 때가 되어 할머니 집으로 올 때면 무화과나무 아래로 돌아왔다. 아그데아그데 열린 무화과를 올려다보기만 해도 마구간의 어린 말처럼 “어무이예에!” 소리가 나왔다. 그러면 나무는 가지를 열고 이파리를 젖혀 무화과를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누런 젖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발꿈치를 들고 무화과를 향해 손을 뻗으면 향란이네 고양이도 허기를 느꼈던지 내 기척에 귀를 쫑긋거리며 앞발을 돋우었다. “야옹!” 소리에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쥐들이 몰려나와 기겁을 하며 달아났다. 소스라쳐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젖물이 흥건할 무화과를 한 번도 손대보지 못한 채 그곳을 달음박질쳐 나왔다. (「무화과가 익는 밤」)
달팽이가 되었다. 낮이면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밤이면 거리를 활보했다. ……. 붉은 선으로 이룬 원고지 한 칸 한 칸이 밤새 내가 돌아다닌 길이었다. 아침이면 해독할 수 없는 문장들이 책상 위에 점액의 흔적으로 남았다. 달팽이가 온몸으로 써 내려간 상형문자처럼, 뜻을 알 수 없는 글씨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하기는커녕 더 선명해지는 것이었다. 어느 날이었던가. 이런 은빛 문장을 보았다.
‘껍데기를 깨야 해!’
(「달팽이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