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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사에세이 > 문인에세이
· ISBN : 9791194171812
· 쪽수 : 214쪽
· 출판일 : 2025-09-01
책 소개
시인 유계영이 매일매일 그러모은
9월의, 9월에 의한, 9월을 위한
단 한 권의 읽을거리
시가 가르쳐준 첫번째 마음
이상하지. 내가 작아질수록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9월, 무한히 펼쳐지고 확장되는 일보 직전의 날들. 이렇게도 뜨거워도 되나 싶은 기록적인 폭염의 여름을 보내며 맞이하는 가을이다. 난다 출판사 시의적절 시리즈 스물한번째 책, 2025년 9월의 주인공은 구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수상 시인 유계영이다. 『무궁무궁』은 4년 만에 펴내는 그의 두번째 산문집으로 열한 편의 시와 함께 산문, 편지, 단상 등을 실었다. 눈을 뜨면 밖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안이 보이는(「시 안 쓰기 시쓰기」), 산문과 시가 서로 호응하도록 구성한 이번 시의적절은 이 한 권 전체가 유계영의 시론이기도 하다. 0.99999…… 끝없이 이어지는 9는 1과 같다. 소수점 이하로 무한히 번지는 세계. 시인은 말한다. 이런 시시한 생각을 할 줄 몰랐다면 1의 무궁무궁도 몰랐을 거라고(작가의 말). 그에게 시는 틈으로만 이루어진 언어. 틈은 공간과 공간 사이에 난 각지각처로 뻗어나가는 무량한 샛길, 빠져나간 빈자리가 발생시키는 리듬이다. 호주머니에 든 동전들은 필요한 정도보다 모자랄 때 맑은소리를 낸다(198~199쪽). 그가 감동하는 것은 작은 목소리, 있음의 틈을 벌리며 빛나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 목소리다(201쪽). “이상하지. 내가 작아질수록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시가 가르쳐준 첫번째 마음이.”(9월 29일 읽기)
울게 되면 더 큰 주목을 받게 된다는 만고불변의 이치를 조기에 알아차린 어린이. 학교 담벼락 생울타리에 심겨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무궁화처럼 운동장의 가장자리로만 운신했던 체육 시간(「무궁무궁」). 태어난 동네에서 단 한 번의 이사 없이 삼십 년을 살았지만 누군가 길을 물으면 죄송해요, 잘 모르는 동네라서요라고 답하는 사람. 인생에 들이닥친 몇 가지 역경에 오른쪽과 왼쪽의 개념을 배웠던 일이 포함되는 사람. 동네 한 바퀴 산책도 약간의 모험심을 요구할 정도(「나무와 나무 사이」)이지만 눈앞에서 흔들리는 개들의 신난 엉덩이를 보며 두 마리 개들과 매일 산책하는 사람(9월 3일 산문). 길에서 데려온 엉망진창 고양이 민지, 떠돌이 개 하이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사람. 여럿 속에 섞여 어울릴 때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사물에게 말을 걸게 되는 사람, 그러다 사물들이 슬며시 들켜주는 특별한 모습을 시끄러운 눈빛으로 그는 본다(64쪽).
무엇도 앞지르려 하지 않고 한 폭으로 살아 있는 시. 시는 최소한의 그림. 오래 바라보면 더 보여주는, 이해가 아닌 관계가 되는 순간. 작게 낮게 얇게 비운 자세만이 틈 사이로 들어갈 수 있다(9월 29일 읽기). 마주하기 힘든 것을 마주해야 할 때. 그에게 잡아먹히기, 아주 작은 사람이 되어. 그의 내부로 들어가 불을 켜고, 그를 먹고, 그에 의해 움직이기. 그렇게 그는 어떻게 해도 자신과 연결되지 않는 대상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호랑이 뱃속 구경」). 시에 마음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가 비켜준 자리, 행간에 담기지 않을까.(9월 26일 산문) “이상해, 자꾸 음악이 발생하는 거야.”(「늘어놓기,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늘어놓기, 완전한 어둠 속에서 늘어놓기……」) “이제 나는 유모차의 텅 비어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207쪽) “그늘은 드리우는 것, 그림자는 포개지는 것, (…) 서로서로 밟고 가기 좋은 그림자들이 태어납니다. 선생님, 나는 태어납니다.”(9월 6일 편지)
그러므로 의미를 사랑하기 위해
무의미의 우주를 향해 휘발되어버리는 시가 필요한 게 아닐까
언어의 의미가 너무 중요한 나머지 시인은 타인과 주고받는 뜻 없는 인사말에도 골똘해진다. 잘 지내느냐는 물음에 잘 지낸다는 답이 즉각 돌아올 때 공연히 상심하기도 한다. 그는 시 읽기가 어렵다던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던 말을 돌려받는다. 소리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해. 너와 내가 목소리를 주고받으며 함께 마주친다는 것이 내용만큼 중요한 거야. 서로의 리듬과 소릿값을 마주치게 하여 만드는 합주(66쪽).
투명한 사냥감을 상상하며 숨죽여 움직이는 고양이를 위한, 방울 소리 없는 방울 목걸이를 시인은 찾아 헤맨다. 불이 켜지지 않는 전구나 끝단이 둥근 나사못처럼 이름과 쓸모가 따로 노는 사물을. 시 수업을 하고 돌아오면 입도 뻥긋하고 싶지 않지만 이 와중에도 시인은 이야기를 원한다고 느낀다. 언어를 통하지 않는 이야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구슬 없는 방울은 정말 까맣게 텅 비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까(9월 8일 단상).
그에게 문체는 텍스트의 영혼에 걸친 직물. 직물의 패턴을 들여다봄으로써 텍스트 너머를 바라본다. 정확한 뜻에 닿지 않더라도 뉘앙스만으로 전해지는 풍부한 신비감, 선명하게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미한 두려움. 시의 활자는 일보 직전의 궤적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는 일보 직후를 이제 독자(청자)에게 넘겨준다(「일보 직전의 말들」). “슬픔은 목구멍 안쪽에서 열점을 기다리는 관악기가 아니라고. 꼭 너에게만 말하려” 한다(「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점의 수학적 정의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시인은 과연 ‘부분이 전체인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한동안 생각한다. 시에서 시를 덜어낼 수 있을까, 풍경에서 풍경만 남길 수 있을까(「동윤에게서 동윤 뺏기」). 그는 쓴다. 점이 아닌 것이 없다고. 나에게서 ‘나’를 덜어낼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부분이 속눈썹 한 올이라곤 할 수 없는 것처럼(55쪽). 어떤 나무가 나의 고통과 무관하게 반짝이고 있을 때, 어떤 잎사귀가 나와 무관하게 색을 터뜨릴 때, 그는 연결과 단절이 얽혀 있는 한 점의 깊이를 본다(「Point, Dot, Spot」). 상처를 벌리기도 하지만 벌어진 상처를 꿰매기도 하는 힘을(「사물의 힘으로부터 떨어져나와」).
나는 새로움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서도 새롭기를 원한다. 언어를 버리기로 하면서 언어의 사소한 기척에도 몸서리치길 희망한다. 새로움의 지위를 지워버린 새로움만 꿈꾼다. 오직 나의 현재로만 흐르는 새로움을 그린다. 잠시간 새로웠다가 다시 기절해버리고 마는 것이길 원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새로워지기도 하는, 거의 살아 있는 상태에 가까워진 것이기를 원한다. 불가능하겠지? 그러나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씩씩하게.
_9월 19일 산문, 「새로움의 매우 짧은 꼬리」 중에서
◎ ‘시의적절’ 시리즈를 소개합니다.
시詩의 적절함으로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제철 음식 대신 제철 책 한 권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는 2025년에도 계속됩니다. 열두 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열두 권의 책. 매일 한 편, 매달 한 권, 1년 365가지의 이야기. 시인에게 여름은 어떤 뜨거움이고 겨울은 어떤 기꺼움일까요. 시인은 1월 1일을 어찌 다루고 시의 12월 31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하루도 빠짐없이, 맞춤하여 틀림없이, 매일매일을 시로 써가는 시인들의 일상을 엿봅니다.
시인들에게 저마다 꼭이고 딱인 ‘달’을 하나씩 맡아 자유로이 시 안팎을 놀아달라 부탁했습니다. 하루에 한 편의 글, 그러해서 달마다 서른 편이거나 서른한 편의 글이 쓰였습니다. (달력이 그러해서, 스물여덟 편 담긴 2월이 있기는 합니다.) 무엇보다 물론, 새로 쓴 시를 책의 기둥 삼았습니다. 더불어 시가 된 생각, 시로 만난 하루, 시를 향한 연서와 시와의 악전고투로 곁을 둘렀습니다. 요컨대 시집이면서 산문집이기도 합니다. 아무려나 분명한 것 하나, 시인에게 시 없는 하루는 없더라는 거지요.
한 편 한 편 당연 길지 않은 분량이니 1일부터 31일까지, 하루에 한 편씩 가벼이 읽으면 딱이겠다 합니다. 열두 달 따라 읽으면 매일의 시가 책장 가득하겠습니다. 한 해가 시로 빼곡하겠습니다. 일력을 뜯듯 다이어리를 넘기듯 하루씩 읽어 흐르다보면 우리의 시계가 우리의 사계(四季)가 되어 있을 테지요. 그러니 언제 읽어도 좋은 책, 따라 읽으면 더 좋을 책!
제철 음식만 있나, 제철 책도 있지,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기획입니다. 그 이름들 보노라면 달과 시인의 궁합 참으로 적절하다, 때(時)와 시(詩)의 만남 참말로 적절하다, 고개 끄덕이시라 믿습니다. 1월 1일의 일기가, 5월 5일의 시가, 12월 25일의 메모가 아침이면 문 두드리고 밤이면 머리맡 지킬 예정입니다. 그리 보면 이 글들 다 한 통의 편지 아니려나 합니다. 매일매일 시가 보낸 편지 한 통, 내용은 분명 사랑일 테지요.
[ 2025 시의적절 라인업 ]
1월 정끝별 / 2월 임경섭 / 3월 김용택 / 4월 이훤 / 5월 박세미 / 6월 이우성
7월 박지일 / 8월 백은선 / 9월 유계영 / 10월 김연덕 / 11월 오병량 / 12월 고선경
* 사정상 필자가 바뀔 수도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 2025년 시의적절의 표지는 글과 사진을 다루는 작가 장우철과 함께합니다.
목차
작가의 말 한 걸음만 딛고 싶게 7
9월 1일 일기 Point, Dot, Spot 11
9월 2일 시 있다 15
9월 3일 산문 사물의 힘으로부터 떨어져나와 19
9월 4일 시 요가원에서 27
9월 5일 산문 무궁무궁 33
9월 6일 편지 그늘과 그림자—나의 선생님들에게 39
9월 7일 시 그림자놀이 45
9월 8일 단상 방울 속은 텅 비어 51
9월 9일 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59
9월 10일 단상 이웃들을 괴롭히지 않기 위하여 63
9월 11일 시 한붓그리기 69
9월 12일 산문 새와 만나는 방법 75
9월 13일 시 동윤에게서 동윤 뺏기 81
9월 14일 읽기 일보 직전의 말들—나의 첫 시집 『온갖 것들의 낮』 읽기 85
9월 15일 자전 산문 호랑이 뱃속 구경 97
9월 16일 산문 새와 나 사이 111
9월 17일 단상 시 안 쓰기 시쓰기 119
9월 18일 짧은 산문과 시 씨앗 하나 125
9월 19일 산문 새로움의 매우 짧은 꼬리 131
9월 20일 시 수염이 긴 쪽이 어른입니다 147
9월 21일 읽기 무기력기에 접어든 사람에게 1 153
9월 22일 읽기 무기력기에 접어든 사람에게 2 159
9월 23일 읽기 암흑 속에서—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 읽기 165
9월 24일 시 유해조수 171
9월 25일 읽기 살아 있는 것만이 살아 있는 것을 알아본다
—신이인, 『검은 머리 짐승 사전』 읽기 175
9월 26일 산문 맹지盲地에서 183
9월 27일 시 맹지盲地에서 187
9월 28일 산문 나무와 나무 사이 191
9월 29일 읽기 모든 것이 중요하다—나의 사적인 고전 읽기 197
9월 30일 시 늘어놓기,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늘어놓기, 완전한 어둠 속에서 늘어놓기…… 209
저자소개
책속에서
9월은 산책이다. 9월엔 거의 집에 붙어 있지 않는다. 강아지 두 마리와 살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나를 무척 부지런한 사람이라 알고 있지만 그건 오해다. 집 밖을 나서는 이유는 개들의 조리 있는 몸짓에 설득당해서다.
―「사물의 힘으로부터 떨어져나와」 부분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예전부터 나는 우리집 고양이에게 근사한 방울 목걸이를 달아주고 싶었다. 문제는 방울 소리. 나는 청각이 매우 예민해서 소리에 대한 스트레스가 큰 편인데, 인간보다 청력이 뛰어난 고양이는 오죽할까. 투명한 사냥감을 상상하며 숨죽여 움직이는 고양이가 제 몸에서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를 용납할 리 없다. 하지만 예쁜 방울 목걸이를 달아줄 수 있다면 흐뭇한 미소가 끊이지 않을 것 같았다. 분명 나와 같은 입장의 집사도 있을 것 같았다. 자본주의 시장이 이런 수요를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나는 방울 속에 구슬이 없는 방울 목걸이를 찾아다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것은 어디서도 팔지 않았다.
―「방울 속은 텅 비어」 부분
이것이 나의 시예요.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는 나의 시예요. 오늘과 내일이 달라지는 내가 바로 서 있을 수 있게, 언제나 공사중인, 언제나 난장판인 시예요. 그리고 당신의 시를 듣고 있지요. 개미가 개미의 시를 들려주고, 할머니가 할머니의 시를 들려주고 있으니까요. 빈털터리가 빈털터리의 시를 들려주고, 외톨이가 외톨이의 시를 들려주고 있으니까요. 우리들은 공장에서 생산된 장난감 기차가 아니고, 그만그만한 크기의 옥수수나 감자가 아니니까요. 안에서 선명히 들리는 기척이니까요.
―「새로움의 매우 짧은 꼬리」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