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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41602413
· 쪽수 : 96쪽
· 출판일 : 2025-07-25
책 소개
한동안의 의식이었네.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의 한동안”
한 생을 온전히 바쳐 비로소 반짝이는 시의 광휘
한계 너머를 꿈꾸는 극한의 사유와 언어
문학동네시인선 239번으로 『별빛 탄생』이 출간되었다. “시는 한계 너머를 인식한다”라는 짧고 묵직한 ‘시인의 말’처럼, 시를 통해 세계와 언어, 인간의 근원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지속해온 허만하 시인의 신작 시집이다. 1957년 『문학예술』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올해 93세에 접어들었지만 시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쉼 없는 시작으로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야생의 꽃』 『바다의 성분』 『언어 이전의 별빛』 등을 펴낸 그에게 평단은 상화시인상, 박용래문학상, 한국시협상, 이산문학상, 청마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목월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여하는 것으로 화답한 바 있다. 아득히 긴 시간 동안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해와 지금에 이른 그는 평생에 걸쳐 삶이 시이고, 시가 삶이라는 것을 몸소 증명해낸 그야말로 시詩-인人이라 할 만하다.
『별빛 탄생』은 그런 허만하 시세계의 정수가 담긴 시집이다. 유성호 평론가는 해설에서 이번 시집이 “시원 탐색과 함께 자기 완성의 언어로 나아가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준 예술적 사건”이며, “이는 사랑과 성찰로 가득한 우리 시대의 기록으로서, 흩어져 있던 것들을 다시 모으기도 하고 존재와 부재의 경계나 사랑과 미움의 경계를 넘어 그것들이 새롭게 마주설 수 있도록 하는 역설적 힘으로 다가”온다고 썼다. 그의 말대로 허만하의 사유와 언어는 세계를 형상화함과 동시에 우리 존재를 연결시킨다. 사람 인 자를 보며 “우리들은 마주보며// 잠시// 벼랑처럼// 함께 서 있지 않았던가”(「사람 인(人) 자처럼, 나는」)라 읊조리는 것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닐까. 궁극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시, 한계를 넘어 우주와 우리를 연결하고자 하는 시. 한 시인이 온 생을 바쳐 비로소 별빛과 같이 가느다랗지만 선명한 광휘를 담아낸 시집의 탄생을 함께 지켜보자.
바람은 미래 쪽에서 불어왔다. 나는 바람의 방향과 푸른 하늘 구름의 생태, 그리고 부신 햇빛의 입사 각도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진 뒤의 순결한 풍경에 대한 집요한 사랑을 안고 살았다.
_「최후의 풍경처럼 펄럭이며」
시집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시는 「최후의 풍경처럼 펄럭이며」이다. 대개 첫 시가 그렇듯 이 시는 시집 전반에 걸쳐 이어지는 이미지와 사유가 담겨 있다. 일종의 출사표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시에서 화자는 “은백색 몽블랑 산정”에 서서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진 뒤의 순결한 풍경에 대한 집요한 사랑을 안고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곳에서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저 “펄럭이며 서 있”을 뿐이지만, 그는 동시에 “나의 직립은 지금, 거의 극한을 견디고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견디고 있는 극한이란 이 세계 안에 존재함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리라. “바람의 방향” “푸른 하늘 구름의 생태” “부신 햇빛의 입사 각도” 등을 “기억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묘사되는 풍경들 속에서 그는 세계와 자신을 견주는 듯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상은 이후에 나오는 시들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그려진다.
내가 세계를 보는 눈빛은 세계가 나를 보는 눈동자 반짝임이다. 당신이 ‘나’라 부르는 정체불명이 내가 포옹하는 따뜻한 남인 것처럼.
_「풍경 눈빛」
시집에 수록된 53편의 시는 세 부로 구성되어 한 줄기의 커다란 흐름을 이룬다. 1부 ‘세계 이전의 형상’에서 화자는 세계를 바라보며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을 상상한다. 그는 광활한 우주 안에서 ‘최후의 풍경’을 그리기도 하고,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사라진 모든 존재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역사 이전’으로 돌아가 “최후의 네안데르탈인이 지르는 고함소리”(「역사 이전을 향하여, 나는 눈물자국처럼」를 듣기도 하는 그는 이내 이렇게 되뇐다. “애처로움은 우주의 원소다. 멘델레예프가 잊어버린 원소. 하늘과 땅 사이에 서려 있는 원소”(「눈빛은 원시적으로 말한다」). 2부 ‘오직 높고 넓은 파란 하늘’에서는 광대무변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한다. 그는 “산그늘 적설처럼 쌓”(「시간의 발자국)」)이는 ‘시간의 발자국’을 지켜보고, “부서지고/ 사라지고/ 살아나고/ 다시/ 구겨지고/ 틀어지고/ 부서지”(「물결은 정직하다」)는 물결의 정직함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2부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하다. “지난 겨울 새 한 마리, 자욱한 눈발 속을 일직선으로 날았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새 한 마리 눈발 속을」). 시인은 자연의 이유를 짐작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와의 합일을 꿈꾸는 듯도 하다. 3부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서는 세계와 자연을 거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부제가 담고 있는 ‘나타남’과 ‘사라짐’ 그 ‘사이’라는 표현은 화자가 존재를 바라보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나는 끝내/ 한동안의 의식이었네./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의 한동안”(「버지니아 울프의 우즈강 노트」)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별빛이 태어나는 곳은 머나먼 우주의 끝이 아니라 “하늘 쳐다보는 아름다운 뺨의 비탈을 흘러내리는 한 방울 눈물의 반짝임”(「별빛 탄생」)이라는 깨달음은 시인 허만하가 평생에 걸친 길고 긴 시의 여정을 통해 당도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짐작케 한다.
나타나는 일이 그대로 사라지는 일이 되는, 도착하는 일이 바로 떠나는 일이 되는.
_「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앞서 이야기했듯 시집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영하의 겨울밤 가늘게 떠는 별빛이 태어”(「별빛 탄생」)나는 자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그가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어디로 가야 할까?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의 “나타나는 일이 그대로 사라지는 일이 되는, 도착하는 일이 바로 떠나는 일이 되는”이라는 구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허만하에게 존재는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의 한동안’이듯, 나타나는 일은 그대로 사라지는 일, 도착하는 일은 바로 떠나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시집의 마지막 문장은 다시 시집의 첫 문장으로 이어진다. 시집의 마지막 자리에 연달아 놓인 「최후의 바다」 「물의 종착지」 「별빛 탄생」을 통해 화자는 이윽고 끝에 다다르지만, 첫 시를 읽은 우리는 알고 있다. ‘최후의 풍경’에서도 “바람은 미래 쪽에서 불어”(「최후의 풍경처럼 펄럭이며」)온다는 것을. 최후 다음에도 미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은 유성호 평론가가 이야기한 대로 허만하에게 최후는 “시간적 마지막이 아니라 존재의 궁극”(해설에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 허만하는 이와 같은 영원과 찰나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에서 한계 너머 존재의 궁극을 바라보고 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세계 이전의 형상
최후의 풍경처럼 펄럭이며/ 황홀한 소용돌이/ 눈빛은 원시적으로 말한다/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그의 위치/ 사람 인(人) 자처럼, 나는/ 은백색 늑대 한 마리 달리고 있다/ 듣고 싶다 눈 내리는 소리/ 폭설의 눈송이 틈새/ 초벌구이 얼굴/ 교차로 얼굴/ 두 손으로 얼굴 가리듯/ 꽃가게에서/ 황지 버스정류소/ 역사 이전을 향하여, 나는 눈물자국처럼/ 지층
2부 오직 높고 넓은 파란 하늘
바람의 둥지/ 바람의 이유/ 시간의 발자국/ 물그늘과 눈동자 깊이/ 불의 계절 이야기―2019년 8월 18일 오후 2시 30분, 김해공항/ 석탄의 의지/ 캄캄한 액체/ 역사/ 해안선은 한 걸음 더 멀리/ 연기를 보다/ 올리브그린 저항/ 최후의 한 사람, 야생의 바다로/ 물결은 정직하다/ 물그늘/ 풍경 눈빛/ 밤의 이유/ 새 한 마리 눈발 속을
3부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
극한의 고독, 그리고 시가 태어나는 자리/ 아름다움은 위험하다/ 굳은살 발바닥/ 비닐의 융통성/ 나무의 얼굴/ 카본데일 소재 현옥이 무덤 생각하며/ 버지니아 울프의 우즈강 노트/ 길에서 우연히 얻은 메모 셋/ 장성의 가을/ 시외버스 정류소/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다/ 표류물/ 정오의 바다에서/ 야성의 영광/ 이서의 새/ 교감/ 섬의 역사/ 최후의 바다/ 물의 종착지/ 별빛 탄생
해설| 시를 통해 가닿는 존재의 기원과 궁극 | 유성호(문학평론가)
저자소개
책속에서
바람은 미래 쪽에서 불어왔다. 나는 바람의 방향과 푸른 하늘 구름의 생태, 그리고 부신 햇빛의 입사 각도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진 뒤의 순결한 풍경에 대한 집요한 사랑을 안고 살았다.
_「최후의 풍경처럼 펄럭이며」
그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얼굴은 누군가의 형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역사의 발자국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어려운 것과 함께 깃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
_「교차로 얼굴」에서
가뭄에 목마른 하늘을 쥐어짠 높이에서 잊지 못할 흙의 향기를 찾아 선선히 몸을 던지는 최초의 빗방울처럼 그리운 뺨의 벼랑을 찾아, 수정체 그늘에 고이는 아슬아슬한 물의 수위, 바람을 만난 물그늘처럼 가늘게 떠는 어깨. 검고 해맑은 어둠의 궁륭에서 잊힌 애처로움처럼 반짝이는 축축한 별빛.
_「눈빛은 원시적으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