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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91143024145
· 쪽수 : 340쪽
· 출판일 : 2026-05-30
책 소개
목차
서(序)
공자 2464년 계축(癸丑, 1913) 음력 12월 초2일 계미(癸未)
12월 3일 갑신(甲申)
12월 4일 을유(乙酉)
12월 6일 정해(丁亥)
12월 8일 기축(己丑)
12월 9일 경인(庚寅)
12월 10일 신묘(辛卯)
12월 11일 임진(壬辰)
12월 12일 계사(癸巳)
12월 13일 갑오(甲午)
12월 14일 을미(乙未)
12월 15일 병신(丙申)
12월 16일 정유(丁酉)
12월 19일 경자(庚子)
12월 20일 신축(辛丑)
12월 21일 임인(壬寅)
12월 22일 계묘(癸卯)
12월 23일 갑진(甲辰)
12월 24일 을사(乙巳)
12월 25일 병오(丙午)
12월 26일 정미(丁未)
12월 27일 무신(戊申)
12월 28일 기유(己酉)
12월 29일 경술(庚戌)
12월 30일 신해(辛亥)
갑인(1914) 초하루 임자(壬子)
1월 2일 계축(癸丑)
1월 3일 갑인(甲寅)
1월 4일 을묘(乙卯)
1월 5일 병진(丙辰)
1월 7일 무오(戊午)
1월 8일 기미(己未)
1월 초 9일 경신(庚申)
1월 10일 신유(辛酉)
1월 11일 임술(壬戌)
1월 12일 계해(癸亥)
1월 13일 갑자(甲子)
1월 14일 을축(乙丑)
1월 15일 병인(丙寅)
1월 16일 정묘(丁卯)
1월 17일 무진(戊辰)
1월 18일 기사(己巳)
1월 19일 경오(庚午)
1월 21일 임신(壬申)
1월 22일 계유(癸酉)
1월 23일 갑술(甲戌)
1월 24일 을해(乙亥)
1월 25일 병자(丙子)
1월 26일 정축(丁丑)
1월 27일 무인(戊寅)
1월 28일 기묘(己卯)
1월 29일 경진(庚辰)
1월 30일 신사(辛巳)
2월 초 1일 임오(壬午)
2월 2일 계미(癸未)
2월 3일 갑신(甲申)
2월 4일 을유(乙酉)
2월 5일 병술(丙戌)
2월 초 6일 정해(丁亥)
2월 7일 무자(戊子)
2월 8일 기축(己丑)
2월 9일 경인(庚寅)
2월 10일 신묘(辛卯)
2월 11일 임진(壬辰)
2월 12일 계사(癸巳)
2월 13일 갑오(甲午)
2월 14일 을미(乙未)
2월 15일 병신(丙申)
2월 16일 정유(丁酉)
2월 17일 무술(戊戌)
2월 18일 기해(己亥)
2월 19일 경자(庚子)
2월 20일 신축(辛丑)
2월 21일 임인(壬寅)
2월 22일 계묘(癸卯)
2월 23일 갑진(甲辰)
2월 24일 을사(乙巳)
2월 25일 병오(丙午)
2월 26일 정미(丁未)
2월 27일 무신(戊申)
2월 28일 기유(己酉)
2월 29일 경술(庚戌)
2월 30일 신해(辛亥)
3월 초하루 임자(壬子)
3월 2일 계축(癸丑)
3월 초 3일 갑인(甲寅)
3월 4일 을묘(乙卯)
3월 5일 병진(丙辰)
3월 6일 정사(丁巳)
3월 7일 무오(戊午)
3월 8일 을미(乙未)
3월 9일 경신(庚申)
3월 초 10일 신유(辛酉)
3월 11일 임술(壬戌)
3월 12일 계해(癸亥)
3월 13일 갑자(甲子)
3월 14일 을축(乙丑)
3월 15일 병인(丙寅)
3월 16일 정묘(丁卯)
3월 17일 무진(戊辰)
3월 18일 기사(己巳)
3월 19일 경오(庚午)
3월 20일 신미(辛未)
3월 21일 임신(壬申)
3월 22일 계유(癸酉)
3월 24일 을해(乙亥)
3월 25일 병자(丙子)
3월 26일 정축(丁丑)
3월 27일 무인(戊寅)
3월 28일 기묘(己卯)
3월 29일 경진(庚辰)
4월 초 하루 신사(辛巳)
원문
일자별 여정 및 주요 활동
참고문헌
해설
옮긴이 후기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에서
서(序)
나 승희는 한국의 남쪽 강역에서 태어나 고래마냥 헤엄치듯 이리저리 떠다니며 자라다 이내 늙어 버렸다. 하나 이미 몸을 천지에 의탁했기에, 세상에 대한 이상이 없을 수 없었다. 또 아버지 겸 스승의 가르침과 은혜를 입어, 요순·주공(周公)·공자(孔子)의 책을 읽었기에 그 마음은 항상 ‘중화(中華)’에 있었다. 만년에 난세를 만나 망령되이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나온 뜻을 숭모하다 예순둘이 되던 무신년(1908), 바다 건너 아라사 동쪽 변경으로 나왔고 이듬해 만주 북쪽의 밀산(蜜山)으로 이주했다. 이때 중화가 비로소 나라다워지자, 대총통 원세개(袁世凱) 공에게 요순의 선양(宣讓) 제도와 주공 및 공자가 주창한 덕예(德藝)의 교과를 복원하라 청하며 세 번의 편지를 보냈으나 답이 없었다. 계축(1913) 5월에는 만주 서쪽의 안동현(安東縣)으로 옮겨 남쪽의 선비들과 서쪽 유람을 논의했다. 이어 동삼성 한인 공교 발기회(東省韓人孔敎發起會)를 조직해 12월 북경에 들어가 공교(孔敎) 총회에 이름을 올리고 지부 설립을 승인받았다. 틈이 날 때 같은 조직의 제군(諸君)과 더불어 교과(敎科)의 진행 방향이나 관복의 의례 및 우리 선친의 《이학종요(理學綜要)》·《사례집요(四禮輯要)》·《춘추집전(春秋輯傳)》의 대의를 강론했다. 갑인(1914) 2월, 다시금 원세개 총통에게 편지를 보내 ‘국용(國用)·국난(國亂)·국헌(國憲)·국교(國敎)’, 이 네 가지 일[四事]을 논했으나 또다시 회신이 없었다. 이윽고 남쪽의 곡부(曲阜)로 떠나 공자와 자사의 묘와 주공과 안자(顔子)의 사당을 배알하고, 공자의 고향 ‘궐리(闕里)’에 선친의 ‘삼서(三書)’를 소장시켰다. 3월에 북경으로 돌아왔고, 한 달 뒤 동삼성으로 돌아가 봉천(奉天)에 당도하며 여정을 마쳤다. 아! 이것이 내 생애 첫 유람이었으니 혹 이것보다 나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한 곳의 넉넉한 장소를 점유해 우리 한인(韓人)들이 함께할 곳을 얻었으니 그곳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강명(講明)하며 이 첫 유람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 아래에 그간의 행력(行曆)을 대략 기록해 둔다.
공자 2464년 계축(癸丑, 1913) 음력 12월 초2일 계미(癸未)
(전략) 고려문의 서쪽은 산세가 웅준(雄俊)하고 길머리[路頭]가 이리저리 꺾이고 굽어 있는데, 22개의 굴을 지나서야 비로소 구름 속에 우뚝 솟은 봉황산을 볼 수 있었다. 산 아래의 국면은 반듯하게 펼쳐져 있는데 봉황성(鳳凰城)이 여기에 있다. 일설에는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이라 한다[고구려 사람들이 큰 새[大鳥]를 안시(安市)라 불렀기에 성 이름이 되었다 하고, 혹자는 성의 남쪽 수십 리에 별도로 안시성이 있다고도 한다]. 성주(城主) 양만춘(楊萬春)이 화살로 당나라 황제의 눈을 적중했다고 하는데, 이는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흰 깃이 눈에 떨어졌도다(白羽集玄花)”라고 읊은 시를 따른 것이다. 하나 지금의 눈앞에는 이러한 흔적 없이 온통 변발한 만주족과 창(槍)을 찬 일본 군인뿐이니, 앞선 시대의 영향을 찾아보려 한들 그런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략)
12월 24일 을사(乙巳)
이용[李鏞, 본명은 종승(鐘乘)으로 북청 사람. 판사 이준(李儁)의 자제]이 와서 지나온 일들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과거 해삼위에서 동고동락했다). 또 연길부(延吉府)의 한인 공교회(韓人孔敎會, 북간도의 한인들이 개별적으로 공교회를 세웠다)와 간민회(墾民會) 사이의 알력 다툼에 대해 일러 주었다. 대개 간민회는 야소교와 신학문을 배운 사람이 다수인데 이들이 서로 교섭해 부(府)에 모임을 만들어 일정 정도의 단체를 완성했다. 그러자 외부 사람들은 이를 거북하게 여겼고 농민들 또한 연회비[年金]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며 때마침 나이 든 여러 어른이 설립한 공교회도 평소 기세등등한 신학을 언짢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간사한 이간꾼들이 부추기자, 농민회와 공교회가 함께 분노해 간민회에 행패를 부리고 관청에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번져 윗선을 범하고 소란까지 일으키자 관청에서는 마침내 병졸들을 파견해 겁박한 뒤 주동자를 잡아다 곤장을 치고 옥에 가두고 말았다. 천하를 떠도는 같은 민족끼리 서로 미워하고 악의를 품고 있으니 생각할수록 탄식이 몰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