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55112342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14-08-29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느새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첼로와 바이올린의 협주곡이 흐르는 서재에는 그녀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불협화음처럼 섞여들었다.
민서는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고서는 다시 번역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활자를 보면서도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준성과 이아라가 함께인 모습이었다.
그의 지갑에서 나온 콘돔과 레스토랑에서 함께 있던 탤런트 이아라는 묘한 교집합을 끌어내며 그녀를 뇌를 파먹기 시작했다.
그가 다른 여자를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는 상상만으로도 살갗이 찢어지는 통증이 밀려왔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교만이었을까. 그 실체를 접하고 나자 지독할 만큼 괴롭고 아팠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야금야금 그녀를 잡아먹어 가는 슬픔은 밤이 뿜어내는 음습함과 어우러져 짙은 무거움으로 그녀를 침잠시켰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점점 다가왔다.
이럴수록 태연하게 그를 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를 맞이했다. 그의 눈동자가 파고들 듯 눈동자를 헤집어왔다. 저 강렬한 눈빛은 여전했지만 행여나 알지 못하는 이별의 징조가 있을까 봐 조심스레 그를 살폈다.
준성은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소파 위에 내려놓고서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관능적인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문지르며 원피스 소맷자락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하얗게 드러난 속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외면하듯 돌아섰다.
민서는 휘청이던 다리에 힘을 주고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며 무덤덤한 얼굴로 원피스 소맷자락을 끌어 올렸다. 그에게 내쳐진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이 순간에 무너질 순 없었다.
“……누구야? 그 여자?”
민서는 조용한 음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알 텐데, 탤런트 이아라.”
그도 그녀 못지않게 무심하고 단조로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정말 내가 사랑하는 그 박준성이 맞는 걸까. 뜨겁게 사랑을 나누며, 온종일 지치지도 않고 나를 품었던 그 남자가 맞는 걸까.
응어리진 감정이 솟구쳤다. 정말 박준성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이를 악물며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원피스를 한 겹 벗어 던지고 봉긋한 가슴을 가리고 있던 브래지어를 풀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하얀 레이스 팬티마저 벗었다. 부끄럽고 모멸감에 살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깊은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둘이 무슨 사이야?”
민서는 내리뜬 눈을 들고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민서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 가만히 얼굴을 어깨에 기대었다.
비록 동거였지만 부부와 다를 바 없이 살아온 그 세월이 너무나도 서러워 눈물이 솟았다. 민서는 어금니를 깨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그녀는 마음이 돌아앉은 남자를 어떻게든 다시 되돌려야만 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따뜻한 체온을 부여잡았다. 민서는 뜨거운 숨결을 그의 귓가에 뿜듯이 속삭였다.
“같이 씻어.”
그에게 무언가가 되기 위해 가슴 아프도록 떨며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약한 꽃잎이었다.
“피곤해. 먼저 자.”
민서를 거칠게 밀쳐 낸 뒤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그 단단한 뒷모습을 눈이 시릴 만큼 노려봤다. 그 순간 거실 한쪽 벽면에 곱게 걸려 있던 드라이플라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듯 떨어졌다.
누군가 패대기친 것처럼 꽃은 산산이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가 화훼단지에 가서 직접 사온 꽃이었다. 그 정성이 고마워 그것을 곱게 말려뒀던 것인데 마치 사랑의 종식을 알리듯 저절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붉은 핏빛처럼 흩어진 꽃잎들이 처참했다. 이렇게 만든 것은 다 그의 탓이었다. 민서는 그에게 품었던 애정이 애증으로 변해가는 것을 감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