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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55552193
· 쪽수 : 463쪽
· 출판일 : 2024-05-10
책 소개
목차
머리말 4
1
인연이라 말해도 될까 12
고향이 거기 와 있었네 14
철새 떠나던 날 아침 16
아버지의 우파니샤드 18
비둘기 22
새의 발자국으로 25
남포를 켜면 28
자물쇠 32
장도칼 34
실패를 사 오면서 36
2
수련 40
앓으면서 자란다 45
4백만 원짜리 헌 우산 49
문간방 사람 52
서울의 봄 57
오동나무 61
지붕을 고치며 66
냉면 74
고향 사투리 78
사랑은 은밀한 기도처럼 81
3
대추나무 90
냄새의 향수 94
어물전에서 100
한恨 105
나의 어머니 109
자작나무야 119
싸리나무와 회초리 122
비에 젖은 참새 126
평생도平生圖 130
지금도 해당화는 135
4
도라지꽃 142
별을 접는 여인 145
나의 일요일 151
한복을 입는 마음 155
돌확 159
십 년이란 세월 162
아내의 꽃밭 166
우리나라 정원 170
5
천사 미카엘 상 앞에서 178
꺼지지 않는 촛불 184
K신부와 크리스토폴 성인 상 188
주교관 발코니에 붉은 제라늄을 195
6
아름다운 소리들 204
상추쌈 211
이 가난한 11월을 216
장작 패기 222
달팽이 229
감자 타령 236
비 오는 날 239
돌절구 245
서른한 번째 장미 250
쐐기나방을 보내며 255
바다 259
7
수박 예찬 268
좋은 이웃이란 270
작지만 얼마나 눈부신가 273
블루스카이 275
금붕어도 때로는 외로움을 탄다 279
고흐를 추모하며 281
동해 작은 섬 물가에 284
수줍음을 타는 부처님 288
사랑한다는 것은 291
여우 사냥 294
8
도다리의 친절 300
부채의 미학 304
누나의 붓꽃 313
두 번째 서른 살 318
몇 가지 나의 버릇에 관하여 324
겨울 갈대밭에서 339
발걸음 소리 342
별 348
흔들리는 섬 356
딸기 서리 362
러시아 처녀들의 미소 366
부칠 수 없는 편지 372
9
흰죽 386
나의 귀여운 도둑 387
밤의 찬가 390
11월의 포장마차 395
나의 멸치 존경법 400
물소 문진 405
하늘잠자리 410
나의 두 친구 412
제주 오름 422
다리 위에서 424
10
개밥바라기 430
지팡이 432
몽당붓 한 자루 436
큰애의 쪽지 편지 440
에덴동산에도 442
누님의 마지막 말씀 447
옛날 옛적에 450
연보 460
저자소개
책속에서
바다
바다는 물들지 않는다. 바다는 굳지도 않으며 풍화되지도 않는다. 전신주를 세우지 않으며 철로가 지나가게 하지 않으며, 나무가 뿌리를 내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품 안에 진주조개를 품고 식인상어를 키우더라도 채송화 한 송이도 그 위에서는 피어나지 못한다.
칼에 허리를 찔려도 금세 아물고 군함이 지나가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다는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는 법이 없다. 사람들이 국경선을 긋지만 지도 위에서일 뿐이다. 무적함대를 삼키고도 트림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지배도 인정할 수 없는 바다는 무엇에 대한 자신의 군림君臨도 원치 않는다. 그는 항상 낮은 곳에 머물며 모든 것은 평등의 수평선 위에서 출발하기를 바란다.
바다는 기록을 비웃으며 역사를 삼킨다. 땅은 영웅들의 기념비로 더럽혀졌지만 아직 바다는 그런 것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
어부들은 그물을 던지지만 고기만 넘겨 줄 뿐 바다는 언제나 그물 밖에 서 있다.
바다는 두 손으로 뭉쳐도 뭉쳐지지 않고 잘라 내도 조그만 술잔 하나도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구속되지 않으며 어떤 형태로도 규정되고 싶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길들기를 거부하는 야성. 모든 것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단지 하나의 과정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바다는 언제나 뒤척이고 한숨짓고 몸부림친다. 상승과 추락, 승리와 패배, 욕망과 좌절, 그 두 사이를 일상의 우리처럼 반복한다. 밤마다 고민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바다.
바다는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가식과 허세로 장식하지 않으며 가면을 벗고 순수를 드러낸다.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 것처럼 그 앞에서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우리를 흥건히 적시는 끈끈한 체취, 햇빛에 번득이는 윤택한 피부, 그리고 언제나 출렁이는 풍만한 젖가슴, 한 번도 손상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또 그러할, 저 관능의 출렁임이 언제나 우리를 부른다.
육지가 끝나는 곳에서 바다는 시작한다. 바다는 또 다른 세계를 향한 길이요 가능성이다. 기록되기를 거부하는 태초의 말씀이요, 얼굴을 가린 종교다. 그의 깊고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눈물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것인지를 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도망자들이 찾아가고,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찾아가고, 까닭 없이 가슴이 답답할 때 우리가 찾아가는 바다. 바다는 물 한 모금 주지 않고도 우리의 갈증을 풀어 준다. 우리의 수척한 어깨를 그의 부드러운 어깨로 감싸 안는다.
삶에 대한 회의 앞에서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로 대답하고, 사랑에 대한 의문 앞에서 퍼렇게 멍든 가슴을 헤쳐 보이다가도 그리움 앞에서는 아득히 수평선으로 물러나 가느다랗게 실눈을 뜬다.
사람보다 먼저 취하고 사람보다 먼저 깨는, 슬픔의 눈물만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까지를 함께한 그는, 모든 만灣과 항구와 운하를 가득 채우고도 오히려 넘친다. 때로는 맹수처럼 포효하고 때로는 절벽 같은 해일이 되어 인간의 노작勞作들을 한순간에 쓸어버리지만, 그것은 악의에서라기보다 인간이 자랑하는 그런 것이 얼마나 공허하며 또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를 일깨워 주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설혹 바다가 인간이 이룬 모든 것들을 무화無化시켜 버린다 해도 우리는 성낼 것이 못 된다. 바다로부터 건져 올린 그 많은 전체에 비한다면 우리가 잃은 것이란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깊이도 무게도 잴 수 없는 하나의 물방울이면서 모든 물방울인 바다. 어린아이의 조그만 손에 의해서도 가끔 가볍게 들릴 줄 아는, 꿈과 환상을 함께한 동심의 바다. 그러나 영리한 바보들은 그것을 모른다.
여덟 살 때 내가 본 최초의 바다는 하나의 경이驚異였다. 스물이 되었을 때 바다는 어느새 늘 함께하고 싶은 갈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제 노년의 고갯마루에서 지금 나는 다시 나의 바다를 본다. 바다는 그의 젊음으로 내 나이를 지우고 그의 커다란 눈물 속에 나의 작은 눈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는 그의 품 안에 나의 존재마저 말없이 보듬는다.
인연이라 말해도 될까
영하의 아침 지하철역. 가파른 계단은 언제나 위태로운 과정. 한발 앞서 닫히는 문. 떠나 버리는 전동차의 무심한 뒷모습.
플랫폼 낡은 벤치에 가서 앉는다.
아, 엉덩이에 전해 오는 이 살가운 온기!
누가 남겨 놓은 것일까? 불이 환한 차창으로 내다보던 눈이 상큼한 그 여인일까? 전동차 문이 닫힐 때 구부정한 등을 보이고 승객들 속으로 사라진 내 또래의 그 남자일까?
“왕십리 행 열차가 죽전역을 출발했습니다.”
확성기의 날카로운 금속성. 순간 내 상상력에 금이 간다.
데시벨 단위로 증폭되는 철로의 진동음.
드디어 차가 들어온다.
그 사람의 체온을 내 체온으로 덥혀 놓고 서둘러 일어선다.
저녁 돌아오는 길. 건널목 앞에 이르는 순간 바뀌는 신호등. 잠시 기다린다. 가로수 밑에 눈이 보인다. 세수수건만 한 잔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눈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혹독했던 지난겨울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허리를 굽힌다. 마지막 겨울에 작별 인사를 건네는 마음으로 손을 내민다.
아, 이미 나 있는 다른 사람의 손자국!
누가 남겨 놓은 것일까? 신호등이 바뀔 때 아파트 단지 입구로 사라진 갈색 코트의 그 여인일까? 아니면 그 옆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가던 카키색 점퍼를 입은 중키의 그 청년일까?
질주하는 자동차 굉음. 잠시 내 상상력이 구겨진다.
드디어 신호가 바뀐다.
차들이 멈춘다.
그 사람의 손자국 옆에 내 손자국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건넌다.
고향이 거기 와 있었네
십여 년 전 봄, 서귀포에 허름한 창고가 딸린 귤밭 한 뙈기를 샀습니다. 백두산 기슭에서 태어난 내가 백두산 기슭에서 살 수 없는 몹쓸 세상 만나, 홧김에 한라산 기슭에 뼈를 묻으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내려와 사흘 동안 그달에 번 만큼의 돈으로 공사를 하고 올라갔습니다. 일곱 해 동안 여든여섯 번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고향을 새로 만드는 일이었으니까요.
담쌓기, 연못 파기, 나무 심기와 작업실 리모델링까지 모두 끝난 가을 어느 날, 몇 해를 두고 벼르던 자작나무를 창문 앞에 심었습니다. 물을 주고 지주대를 세우고 손을 털고 그리고 이만큼 물러나서 바라보았습니다. 상큼한 키에, 날렵한 잎새, 분 향기 묻어날 듯 하이얀 수피樹皮. 아, 영락없는 개마고원 태생, 서글서글한 내 고향 북관녀北關女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순여덟 해 전 흥남철수 때, 데리고 올 수 없어 울며 떼어놓고 온 고향이, 거기 와 있었습니다. 내가 못 가니 날 찾아 제가 와 있었습니다. 열다섯 그때 그 모습으로 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