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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56343035
· 쪽수 : 316쪽
· 출판일 : 201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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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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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즈 겟 온. 잇스 코울드."
누비 솜옷을 입은 박흥수는 얼굴이 벌게진 채 서툰 영어로 말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고 남은 재를 화장실에 수시로 뿌려주기만 했더라면, 부엌음식에 쥐들이 입을 대지 못하게 제대로 덮어놓기만 했더라면, 밥을 먹기 전에 손만 제대로 씻게 했더라면, 고열이 나면서 설사할 때 제중원에 바로 데려오기만 했더라면 수많은 아이들이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주말에도 쉴 수 없었다. 빈곤층 부모들은 무지했다. 가난뱅이들은 먹거리만 모자란 게 아니라 지식도 정보도 모자라 어이없는 죽음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의 생각에 대부분 이런 병은 가난에서 오고 가난은 무지에서 오는데 무지는 고칠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러니 가난뱅이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했다. 무지의 늪으로부터 이들을 건져내는 게 선교이자 치료인 셈이었다.
그건 자신이 기대하던 승리의 순간이 아니었다. 패자의 굴욕과 수치, 후회가 없는데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은갑은 아카시 오장이 최종오가 두루마기 안에 감춘 태극기를 빼앗은 뒤 주먹으로 최종오의 뺨을 때리는 걸 보고도 전혀 통쾌하지 않았다. 아니, 되레 수치심을 느꼈다. 최종오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곤 있었지만 젊은 날 불같이 폭발하던 성격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은갑은 왜 최종오가 아닌 자신이 수치심을 느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망해버린 조선은 망하기 전에도 자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데다 그 소작농 아버지마저 술병과 화병으로 일찌감치 세상을 하직하고 나니 어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최종오와 함께 장터에서 주먹질로 밥벌이를 하는 것 외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최종오도 어느 순간까지는 자기와 다를 바 없었다. 배신자가 된 건 자신이 아니라 야소교에 미쳐 미래를 포기한 최종오였다. 자신을 시장터의 주먹으로 만들어주고 순검에 응시하자고 유혹한 것도 최종오였다. 이제 와서 날더러 어떡하란 말인가.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렇다면 끝까지 한번 가보자. 은갑은 이를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