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58606916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19-10-2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영광댁이 수상하다
건반 위의 롤리타
은총 표류기
새로운 시작
헤븐 교도소
빨간 연극
『빨간 연극』을 읽고
- 이영철(소설가·한국문인협회 이사)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영광댁이 수상하다
지축역에 내리면 삼각산 여덟 봉우리가 앞을 턱 가로막으며 다가온다. 산수화 병풍을 두른 듯한 풍광에 시선을 빼앗기며 가다 보면 촌스러운 주막집에 닿는다. 신축 아파트와 번듯한 상가들이 즐비한 가운데 고집스럽게 박혀 성깔을 부리는 모습이 집주인을 꼭 빼닮아 한 번 다녀오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그런 집이다.
천막 지붕 아래 분위기를 낸답시고 통나무 껍질을 드문드문 붙인 벽은 촌스럽다 못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뻑뻑한 미닫이문을 열면 환한 바깥과 침침한 실내가 연결되면서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낮은 문턱 때문에 손님이 자연스레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형상이라 시작부터 압도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잘못 들어왔다며 되돌아 나가는 이는 별로 없다. 하이칼라식의 머리 모양으로 반듯하게 가르마를 타고 헤어 로션과 무스로 정리해 시원스럽게 드러난 이마와 오뚝한 코가 거칠 것 없어 보이는 주모가 시큰둥하게 맞는다. 뭐야? 비장의 무기라도 있다는 거야? 호기심에 일단 들인 발을 물리지 않는다.
“여기 ‘먹거리 호프’에 오면, 호프는 없당께. 있다면 소주, 맥주, 막걸리뿐이랑께.”
귀에 착착 감기는 전라도 사투리에 혹한 손님이 일단 초라한 의자에 엉덩이를 앉힌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따로 봐주는 일 없이 공평하고 일관되게 대하는 게 이 집의 주모 영광댁의 방식이다. 경우에 틀렸다 싶으면 걸쭉한 욕부터 내지르고 나서 뒤를 해결한다. 거친 입담과 시골 할머니 같은 손맛에 반한 사람들은 귀와 입이 궁금할 때 일삼아 영광댁을 찾는다.
참 애매하게 촌스러운 상호다. 차라리 ‘영광집’이 낫지 ‘먹거리호프’가 뭔가? 하지만 영광댁 깜냥으론 한껏 멋을 부린 상호일 터이다. 호프집에 어울리지 않게 메뉴는 꽁보리밥, 된장찌개, 잔치국수, 굴무침, 병어조림, 묵은지, 나물무침, 열무김치에 홍어회다. 음식을 만드는 와중에도 걸쭉하게 받아치는 그녀의 입담은 남정네들의 기를 팍팍 휘어잡는다. 막노동판에서 뼈가 굵은 거친 사내들도 경우에 틀렸다 하면 단박에 혼쭐이 나고 만다. 해서 알 만한 사람은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예외 없이 꼬랑지부터 내린다. 그러고는 너나없이 영광댁과 한마디라도 더 말을 섞어보고자 안달이다.
“아따! 잡것이 입맛은 청와대여! 그라지. 간간하게 먹어야 잔병이 없째이!”
겉절이, 찐 무시래기, 젓갈, 굴무침과 과일까지 밑반찬으로 내놓고는 손님이 따로 안주를 주문하기 전까지는 절대 묻지도 않는 게 그녀 스타일이다. 술장사는 안주에서 남는 이문이 절대적인데 그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는 걸 보면 누구보다 애주가의 속을 잘 아는 영광댁이다. 안줏값 걱정말고 마음 편히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라는 그녀의 배려를 모르는 바보는 없다.
그녀의 걸쭉한 인사와 함께 맛난 안주가 곁들어 나오면 손님들 입이 함박만 하게 벌어진다. 어디 가서 푼돈으로 이런 진수성찬을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다 허물어져 가는 천막 포장마차를 찾는 이유는 그녀의 손맛이 제대로 밴 푸짐한 밑반찬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낙지, 문어, 오징어, 꼴뚜기 중 하나와 마른 생선구이가 또 덤으로 나오는데 절대 계산에 포함하는 법이 없다.
“아주 간단한 서비스여!”
영광댁이 중얼거리며 손님상에 내놓는다. 단골손님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밑반찬 인심은 후해도 친절과는 담을 쌓은 영광댁이라 술 취해 비틀거리는 손님 꼴을 못 본다. 가차 없이 단호해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고 쫓겨난다.
“거시기 그러니까 언능 가라고! 지난번 그년 주정 피며 개기니까 낯짝 배기 두어 대 올려붙여 떠밀어 보냈잖아. 야! 누나가 가래잖냐! 야! 너는 왜 안 가? 누나가 존 말할 때 말 들어! 자정거나 잘 끼고 가라 잉! 넘어지지 말고. 이것들이 손맛을 봐야 하나! 아무 데나 자빠지고 지랄을 하니……. 내 참! 빨리들 가라 잉!”
취한 손님을 내쫓으면서도 그녀의 손놀림은 재빠르다. 도마에 올려진 오징어가 퍼즐을 펼쳐놓은 듯 그녀의 양념 묻은 손끝이 주물럭거리면 맛깔스러운 안주가 되어 나온다. 손님들은 그런 그녀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술잔을 만지작댄다.
드물지만 간혹 손님 중 점잖고 매너 좋은 신사에게는 오빠라는 특별 호칭이 따른다. 이어서 그녀의 특별한 천사표 말투가 비단결처럼 자르르 구른다. 하지만 자기보다 한 살이라도 아래면 무조건 동생이다.
“영광댁! 어쭈 금메 뭐시다냐.”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말을 건넨다. 그녀는 대꾸를 잠시 미루고, 이쪽을 향해 말한다.
“쟤 봐라. 암만혀도 입맛이 경기도 비렁뱅이인가벼. 갈현동서 여그까지 이틀 건너 출근 헌당께. 꼴에 또 유식 층인가벼. 취하면 가곡으로 뽑는당께! 안주가 즈그 입에 딱 맞는다나 워쩐다나 함서. 또 쟤는 예 오는 놈들 중 제일 신사 축에 들어. 나머진 다 내가 손봐서 보내야 돼야. 뒈지게 맞고도 또 와. 염병할 놈덜!”
그때 바랑을 둘러멘 스님이 허리를 굽히고 들어와 목탁을 치자 영광댁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하던 일을 멈추고 재빠르게 앞치마에서 천 원짜리 두 어 장을 끄집어 내주며 합장해 보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좀 전에 손질하던 병어 조림이 어느새 뚝딱 만들어져 남자의 테이블에 놓인다.
“뉴타운 은평 신도시도 이제는 끝나가는군. 내년이면 또 어디로 옮겨 가서 판을 벌여야 헐지 몰러! 아! 거시기 뭐여 젠장할 것, 또 있네! 오늘은 해물 차가 안 왔는디 꼬막이 이거 뿐이여, 서비스가 이거뿐이랑게. 그란디 거시기 뭐여 오빠!”
덤 안주의 고마운 답례인 듯 곱상한 남자가 맥주 한 병을 들고 영광댁에게 권하자 그녀는 맥주잔에 가득 부어 단숨에 쭉 들이키고 말을 잇는다.
“헌디 종씨 오빠 오늘은 안 모시고 왔어? 둘이 와서 같이 있어야 재미진디. 오빠 둘은 서로 사이도 좋고 내가 보기에 젤 좋더라! 오늘 종씨 오빠한테 새로 나온 문자 좀 한 수 배울라치면 안 오더라. 그 오빠도 나처럼 쌍시옷 안 들어가면 말이 싱거워! 확실히 간을 쳐야 혀. 나 참 좋아 부릴라고 허네. 환장 했나벼 씨부럴.”
머지않아 재개발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떠나야만 할 이곳. 가난한 서민들은 돈 한 푼 없이 시작해야 하는 두려움으로 앞날이 막막하다. 그동안 복작거리며 나누었던 이웃들의 끈끈한 정도 이제 안녕이다. 가난하지만 평온했던 일상들이 사라져버린다는 불안감. 어떤 이들은 평생 이곳에서 나고 자랐는데 재개발로 그들의 지난 이야기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모르는 도시가 세워질 것이다. 아직 떠나지 못한 노인들의 앞날은 더욱 답답하다. 하루하루 조여 오는 숨통을 붙들고 버티고 버티다 결국 떠밀려 하나둘 떠날 수밖에 없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몇 세대 가운데 영광댁이 끼어 있다.
그녀가 이곳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기억하기 싫지만 떼어버릴 수 없는 사연이 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여기를 떠나서는 중심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서 붙박이처럼 여기 뿌리내려 가난도 견디고 모욕도 견뎌냈다. 지금이야 누구도 함부로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