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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0526951
· 쪽수 : 252쪽
· 출판일 : 2022-10-28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1~5
저자소개
책속에서
정임은 하늘색 간호복을 입고, 작은 곰 문양이 수놓아진 프릴이 달린 흰 헤드 드레스를 쓰고 있었다. 넓고 펑퍼짐한 흰 앞치마를 걸치고 왼쪽에는 흰 완장을 차고 있었다. 이따금 다른 환자를 체크하던 그녀가, 목발을 짚고 병실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는 차혁에게 다가왔다. 차혁은 왜소한 체격에 우수에 찬 묘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처음 보면, 상대는 그의 마음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우호적이지도 그렇다고 반감을 주는 눈빛도 아닌, 무뚝뚝하고 애매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웃으면, 차혁의 차갑고 난해하던 눈은 청순한 반달이 되고 말았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였다. 차혁이 냉정하고 무뚝뚝하다고 알고 있는 사람과, 무척 따뜻하고 반듯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 누구도 그가 웃는 모습을 한번 보면, 그의 눈빛이 감추고 있는 따뜻한 인간미를 알아차리곤 그와 가까워졌다.
“당신 옆모습은 언제 봐도 참 슬퍼 보여요. 또 고향 생각해요? 그…… 원동마을?”
차혁이 막장에서 한참을 천공할 때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울리히는 하루치 채탄 목표량을 외치며 지상에서 신경질적으로 전기 수리공을 다그쳤다. 땅속 모두는 우왕좌왕하며 비상 발전기를 가동하게 시켰다. 백열등이 여러 번 깜빡이고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였다. 차혁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빛이었다. 전기가 나가지 않았다면 적당히 묻혀 지나칠 정도의 가녀린 빛이었다. 캄캄한 막장에 전기가 나가면서 암흑이 된 순간 차혁은 자신의 헬멧 등이 비친 앞을 보았다. 막장 안쪽 막, 오후에 부수기 시작한 탄 덩이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는 것이 보였다.
‘엇? 저게 뭐지?’
하마터면 지나칠 뻔한 어떤 것이 탄 더미 속에서 미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 잿더미 속에서 간신히 빛을 발하는 화롯불 같기도 했고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 가루 같기도 했다.
“있었구나! 이게 진짜로 있었어! 세상에!”
어디로 갈지 방향을 찾지 못한 한 중년 사내가 미국 거리를 떠돌았다. 산발한 머리와 긴 수염으로 추레한 몰골을 한 동양인 사내. 나이보다 한참 더 늙어버린 차혁이 거기 있었다. 그날 이후, 차혁은 아내와 아이들의 소식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긴 세월을 거쳐 엘에이 산타모니카 콜로라도까지 흘러와 거리를 떠돌았다. 행인들이 던져준 돈으로 술에 취한 차혁. 그의 품에는 아직도 독일 보훔광산의 블루 스톤이 들어있었다. 사랑했던 아내 정임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두 딸의 모습도 이젠 꿈처럼 희미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리려 해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이 그를 괴롭혔다. 비틀비틀 술병을 들고 거리를 걷던 그가 실성한 듯 하늘을 향해 웃었다. 모두가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 겨울밤이었다. 하나둘 불이 꺼지는 낯선 거리. 그가 젖은 눈으로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보…… 내 딸 은혜야…… 은희야…….”
손님 하나 없는 오래된 카페에서 잡음과 함께 쓸쓸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차혁은 후미진 공원 벤치에 천천히 앉아 독한 술을 마시며 그 노래를 들었다. 오래전 어느 날 새벽, 제주 애월항을 떠나 지금까지 부평초처럼 흘러 다닌 일들이 슬픈 영화처럼 그의 눈앞을 스쳐 갔다. 차혁은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고 서글퍼서 홀로 눈물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