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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58609658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1-08-01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4
그해 부활절 8
항구의 불빛 31
오르지 못하는 나무 61
열등감의 정치학 71
고향의 봄 85
마음보석 장학회 104
부끄러운 시민 114
멸치의 꿈 122
새 이름, 새 사람 132
멀고 높은 곳으로 145
가벼운 바람결처럼 160
그리운 도산(島山) 169
머나먼 여로 180
순례자의 노래 192
전선야곡(戰線夜曲) 206
작은 돌멩이 하나가 231
바람의 둥지 240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해 부활절
부활절 아침. 지석은 아파트 15층인 공부방 창가에 앉아 공원의 숲을 내려다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바깥을 내다보니, 한창 곱던 벚꽃은 지고, 그 자리엔 파아란 잎이 돋아나고 있다. ‘단풍 든 나뭇잎은 꽃보다 아름답다(霜葉紅於二月花).’ 옛 시인의 노래를 읊조리던 것이 어제 같은데. 세월을 흐르는 물에 비유한 선인들의 지혜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주님 만찬 성 목요일과 주님 수난 성 금요일, 부활 성야와 부활절은 성당에선 연중 가장 바쁘고, 긴장과 기쁨이 어우러지는 시기다. 그런데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벌써 두 달이다. 코비드19 팬데믹. 이 낯선 말 한마디에 온 세상이 깜빡 기절을 해 버린 것이다. 한 주일 뒤로 다가온 21대 총선마저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빌빌거리고 있다.
지석은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컴퓨터에 전원을 넣는다. 그리고는 바로 인터넷 신문을 연결한다. 톱뉴스는 미국에서 코로나 감염자와 사망자가 폭발하고 있다는 기사다. 뉴욕에서만 어제 하루에 779명이 사망하여 뉴욕 누적 사망자 수는 6,268명을 기록했고, 뉴욕 전역에 애도의 조기가 게양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미국 전체의 확진자는 44만 7,793명이고 사망자는 14,586명에 이른다고 한다. 뉴욕의 하트섬에 집단 매장을 한다는 기사도 보인다. 미국 대통령 자신만만하더니 결국 이렇게 됐군. 코로나 바이러스는 큰 나라 작은 나라도 모르고 대통령도 인식하지 못하는 건데. 병 앞에서는 오만하기보다는 겸손한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싶다.
다시 그 아래 기사를 클릭한다. 우리나라의 확진자 수는 10,423명, 검사 진행 중 15,509명, 격리해제 6,973명, 사망자 204명이라고 한다. 세계상황은 확진자 1,459,590명, 215개 국가에서 발생했고, 사망자는 모두 86,993명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나라는 확진자 증가세가 많이 둔화해서 다행이지만 외국 유입 인구가 많아서 대처하기가 힘들고, 이웃 일본에서도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상황이란다. 아직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면서 사회적 거리두기, 개인위생 철저 등을 당부하고 있다.
지석과 친구들이 대구에서 코로나 첫 확진자가 나왔다는 얘기를 안주 삼아 강 건너 불 보듯 느긋하게 술을 마신 것이 지난 2월 중순이었다. 그때 코로나 첫 발생지인 중국 우한은 이미 봉쇄 상황이었지만, 그 사람들이 오후 8시가 되면 집 안에 갇힌 채 창문을 열고 ‘우한 힘내라’를 외치고는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기사를 읽고 감동적이었다고 하면서 웃고 떠들었는데, 대화의 중심은 코로나보다는 오히려 다가오는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모여 있었다.
이상한 방법으로 선거법을 무지무지하게 어렵게 고치고, 어느 정당 대표가 국민은 몰라도 된다고 했다더니, 과연 뭐가 뭔지 헷갈려서 이러다간 선거를 치러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고 모두가 투덜거린다.
그랬었는데 며칠 후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구의 이상한 종교집단에서 터지기 시작한 코로나 감염자 폭풍은 청도 어느 요양병원과 이름을 나란히 하고는 그야말로 폭탄 터지듯 터졌다. 확진자 수가 하루에만 7백 명을 넘어서고, 드디어 대구봉쇄 얘기가 나오고, 대구와 경북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공무원과 의료진은 비상사태에 돌입했고, 대구시의사회장의 호소를 듣고 전국 각지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대구로 달려왔다. 지석도 친구가 이메일로 보내어준 그 호소문을 읽어보았는데, 진정성이 넘치고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유령이 있는 풍경
빈털터리가 된 채 이혼 당한 시현은 달리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자기 소유의 집이 한 채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운전하며 가는 동안 그는 이미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 것을 실감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안개에 잠긴 늪지였고 지나는 사람이나 짐승 한 마리 구경 못했다. 도시에서 두 시간 남짓 거리였는데 딴 세상으로 들어선 것 같았다. 마음의 거리는 더 막막해서 티베트 오지에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안개 자욱한 황야를 헤매었고 황천인 듯 싯누런 강이 망망대해처럼 펼쳐졌다.
“가끔 도도 닦고 명상을 하자.”
그는 긍정적인 마인드컨트롤을 하기 위해 힘차게 말했다. 그는 무교였지만 여러 종교와 도, 명상, 무속까지 약간은 관심이 있었다.
붓다의 말씀이 떠올랐다.
‘한적한 장소를 향해 일곱 걸음만 내딛어라, 강가 강 모래알만큼 수많은 겁(怯)동안 붓다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이로움이 크다.’
붓다는 그렇게 길 떠나는 수행자를 격려하였다.
그는 치아를 슬쩍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공양을 올렸으니, 극락은 예약해 두었다, 이참에 은둔수행자처럼 살아 보자. 농담처럼 결심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가슴이 미어지던 쓸쓸함이 힐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외딴 집, 산골 은둔처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선행이 된다네…….”
그는 멜로디를 붙여 노래 부르듯 흥얼거렸다. 마인드컨트롤은 성공했다. 그 집으로 가서 사는 일이 대단한 선행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는 안개등을 켜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운전했다. 괜히 창을 열었다. 창문을 열었다가 재채기를 했고 문을 닫자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차 안을 금세 가득 채운 안개는 그저 미스트 같은 것이 아니었다. 플라스틱을 태운 것 같은 역한 냄새와 먼지 알갱이가 섞여 있었다.
8인용 승합차에는 대형 캐리어 두 개와 잡다한 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승합차는 비포장의 좁아터진 길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렸고 구불구불 돌았다. 그는 뱀 같은 길이 구부러질 때마다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속도를 줄였다. 누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놀이동산 코스 같았다. 작은 마을로 진입하자, 언덕 중턱에 우뚝 선 회색 이층집이 보였다. 시현이 물려받은 집이었다.
조부가 땅 부자였던 시절, 그 집도 별장으로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그 후 종손인 큰형은 별장을 관리하며 펜션으로 쓰기도 했지만 적자를 보자 방치해 두었다. 쓸모 있는 땅과 집은 종손 차지였고 시현에게도 황무지와 폐가 한 채가 떨어졌다. 돌아갈 집 한 채가 있는 것이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혼을 하자 그는 집에서 나와야 했고 수중에 남은 돈도 없었다.
캐리어 두 개만 끌고 그는 언덕을 올라갔다. 캐리어 속에는 고가의 캠코더와 카메라가 있어 조심스럽게 취급해야 했다. 바닥이 울퉁불퉁해지면 번쩍 들고 올라갔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고, 대문 앞에 서자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역한 안개를 들이킨 탓인지 가슴에 뻐근한 통증이 지나갔다.
바람 부는 방향이 달라지자 안개가 옅어졌다. 부근 어딘가에 공장이 있는데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안개가 오거나 가는 것 같았다.
조부가 살아계실 때 이 집에 몇 번 놀러왔던 기억이 났다. 어린아이였을 때 이 집은 ‘백조의 성’처럼 하얗고 아름다웠으며 지붕은 붉은 색이었다. 백조 대신 흰 거위가 연못에서 헤엄쳤다. 주황빛 부리와 주황빛 물갈퀴의 뽀얀 거위는 짙은 화장을 한 듯 예뻤고 개보다 더 사나웠다. 낯선 사람이 오면 개처럼 짖으며 쫓아다녔고, 어린 시현을 죽일 듯 부리로 쫀 적도 있었다. 그때 거위 부리에 찍힌 흉터가 그의 짙은 눈썹 속에 비밀스럽게 숨어 있었다.
그는 아련한 감상에 젖은 채 성처럼 높은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담 위에 도둑이 오를 수 없게 뾰족한 창살이 빽빽이 꽂혀 있는데, 창살은 붉은 녹이 두터워 피부에 스치기만 해도 파상풍에 걸릴 것 같았다. 그 흉하게 녹슨 창살을 담쟁이와 넝쿨 장미가 절묘하게 감싼 채 감추고 있었다. 뭔가 소중한 것이 있어 단단히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자는 숲 속의 절세미녀라도 있나. 미녀가 잔다는 소문이 나면 남자들은 백리 가시밭길이라도 기어서 담을 넘어 올 것이다. 가시 장미 길이 열리는 대신 그는 열쇠로 문을 땄다. 철문은 금속성 굉음을 지르며 활짝 젖혀졌고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서 시원한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대저택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아직도 쓸만해 보이는 이층집과 조경사가 와서 가꾼 듯 풍성한 장미 밭과 둥글둥글한 향나무들이 그를 맞았다.
“아, 누가 왔다……. 어서 오세요…….”
순간 소곤거리는 소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았다.
환청이겠지, 시현은 실제로 들린 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울린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