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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58966065
· 쪽수 : 112쪽
· 출판일 : 2023-08-31
책 소개
목차
제1부
왜가리•13/포인세티아•14/어제의 산책자•16/그러니까 튤립•17/저녁 한 조각•18/한낮인데도•20/편지•21/삼나무 사잇길•22/한파•24/한파 2•25/봄 혹은 빗방울•26/지하실•28/아무리 걸어도 저녁•29/내일이 오면•30/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32/이유 있는 슬픔•34/그랬을까•35/어제•36
제2부
왼편에 대한 탐구•39/너만의 방식•40/저녁의 발자국•42/새벽 창문을 넘어•43/서쪽으로 흐르는 냇물은•44/내일은 다시•46/연두•47/저녁의 슬픔•48/매화•50/눈사람•51/옆집 사람•52/크로커스•54/11월•55/밤의 창문에 매달려•56/조춘(早春)•58/빨래•59/기억들, 엉겅퀴의•60/메기와 하수관 사이에서•62
제3부
한식•65/진정되지 않는•66/천둥을 찾아•68/슬픔이 온다•70/비 갠 뒤•72/달맞이꽃•73/누구의 마음인가•74/먼지가 흩날리는 집•76/끝내 못다 한 이야기•78/바오바브나무에 걸린 모자는 두고 왔네•80/파타고니아의 바람일까•82/비린내와 달콤함 사이•83/단풍나무의 숨바꼭질•84/전화를 끊고 난 후•86/목요일에서 조금 떨어져•88/하나의 망초•90/감자꽃은 떨어지고•92/세상 끝이 뭐 어디 가겠습니까•94/밤의 인사•96
해설 오민석(시인·문학평론가)·97
저자소개
책속에서
방문을 열었을 때 책상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왜가리였다 왜가리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벽만 보고 있었다 분명 저녁에 수변 길을 산책할 때 마주친 왜가리였다 나는 전혀 아는 척하지 않았고 노란 눈동자에 어른거리던 물그림자도 눈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왜가리는 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이제는 나를 빤히 노려보며 영리하게 보이는 눈을 반짝이고 있다 물풀의 가벼운 흔들림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일없이 창문 너머 저녁 하늘만 바라보았다 나는 왜가리가 나갈 수 있도록 문간에서 비켜났다 날개를 펼쳐 들었을 때에는 온 방 안이 날개로 뒤덮인 양 나는 몸을 움츠렸다 왜가리는 책상을 부리로 톡톡 두 번 두드린 후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날개를 접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오히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땅거미 내려앉는 하늘에 바람 소리였나 뭔가 등을 두들겼다 나는 끝내 방문을 열지 않았다
― 「왜가리」 전문
어제의 발걸음은 간명하여 경쾌하였다. 순전히 아카시아 향내 탓이었다. 흰 꽃들이 저녁 내내 비명을 질러댄 탓도 있었다. 얼굴을 마주 보며 한없이 끌어당기는 흰 비밀이 있었다. 창문을 넘어온 손가락은 길고 힘이 있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니 온통 검은 얼룩뿐이었다. 사용할 수 없는 왼손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어제의 발걸음을 정리하고 목록을 내밀었다. 맨발로 걷고 있었으니 약간의 흉터는 무시하기로 했다.
참고로 어제의 미소는 나의 것이 아니다.
― 「어제의 산책자」 전문
나뭇가지를 흔드는 작은 손이 있다
이렇게 가벼운 손을 가진 것은
봄 혹은 빗방울
그렇지만 웅덩이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첨벙첨벙
십 년째 혼자 걷고 있는데 십 년 후에도 혼자 걷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날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리 발자국에 어른거리는 눈물 자국을 따라 걷는다
집이 좁아서 울지를 못하고
눈물을 흘리려면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야 한다
목청껏 울기 위해서는 울산바위에라도 가야 한다
나뭇잎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제 사랑을 잃고 있다
지나가는 계절은 그냥 지나가고
마른풀들은 몸을 흔드는데 꿈꾸는 기분인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는
말채나무의 온기에 손을 녹인다
한바탕 비가 쏟아지면
오리도 나뭇잎도 알맞게 몸을 숨긴다
그리고 울기 좋은 때
함께 우는 것은
봄 혹은 빗방울
― 「봄 혹은 빗방울」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