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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58966478
· 쪽수 : 132쪽
· 출판일 : 2024-05-23
책 소개
목차
제1부
너의 눈빛·13/압력을 벗어난 밥솥·14/초록의 가계(家系)·16/허공·18/흔적·20/못·22/단추·24/공존·26/하얀 끌을 쥔 손·28/인터셉트·30/사랑의 습관·32/동백의 전언·34/로드킬·36/핼러윈, 헬로 잭! 우리가 간다·38
제2부
집착·43/평행이론·44/섬 아래의 일·46/영화관 양식·48/새장·50/우주의 화가·52/벽, 당신·54/무명 시인·56/실오라기·58/파본(破本)·60/구두 수선공 안씨·62/살아난 눈빛·64/말을 잃은 마부·66/경계의 꽃·68
제3부
행여나 당신을 켜 보네·71/때가 되면·72/속 이야기·74/덫·76/내 친구는 우주인·78/꽃의 이름을 잃음·80/고양이, 우주를 날다·82/경과·84/릴레이·86/방화범은 제가 방화범인 걸 모르지·88/헤어져서 만나는 사람·90/엑스트라·92/이후·94
제4부
사랑·97/아버지는 우체국에서 발송된다·98/취업준비생·100/누에의 집·102/추인·103/강의 은유·104/노을 독법·106/해안은 세상에서 가장 긴 수술대이다·108/초록 의용군의 힘·110/가장(家長)·112/침수·114/각성·116/미제(謎題)·118
해설 오민석(시인, 문학평론가)·119
저자소개
책속에서
다소 늙은 안식이려니 했다
당신이 앉거나 고양이가 잠들 때도
어쩌다 지친 새가 머물 때도
풍경만 바뀐 동행인 줄 알았다
의자가 이름이 되기 위해
의자가 될 뻔한 수많은 이름들
나는 이름 속에 묻힌 익명의 제보자
내 몸의 기슭에 파도가 치다가
급기야 내 정강이뼈를 물어뜯을 즈음
비로소 바다의 배후가 궁금했다
바다도 제 바닥을 모르는 눈치였다
바다가 실어 나른 수많은 의자
구름처럼 떠다니는 평화
격랑에 휩싸이는 의혹
혹은 바다를 굽어보며 바다를
지배한다고 건들거리는 착각
수명이 다한 의자가 무너진다
그때 젊은 안식은 부푼 내일에 엉덩이를 걸치고
새 의자의 방향을 바꾼다
파도가 데려가는 이생의 자국을 바라본다
의자는 가고
내 몸은 가뭇없이 잠긴다
내 이력은 모래에 합산된다
바다가 된 것만 생각했다
바다는 모래를 뺀 무게라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 「못」 전문
사랑은 울었다. 사랑이 달랬다. 사랑이 울음을 그쳤다. 그러나 사랑이 보이지 않으면 사랑은 또 울었다. 사랑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왔다. 사랑의 사랑스런 손길에 사랑은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사랑이 사랑에게 이럴 거면 합치자고 했다. 사랑은 좋아서 사랑의 목을 껴안았다. 한 몸이 된 사랑은 웃음과 울음을 함께했다. 슬픔에 겨운 사랑이 고뇌할 때 기쁨에 벅찬 사랑이 환호할 때 사랑은 한쪽이 출렁거리거나 반대쪽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비 오는 밤이나 멀리서 종소리 사운거리다 갈 때 사랑은 사랑에 들키지 않고 울 수가 없었다. 하물며 웃을 수도 없었다. 너무 많은 시간이 뒤섞이고 엉켰으므로 티눈과 우주만큼이나 사랑은 분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친 사랑이 침묵할 때 그 사랑의 등에 기댄 사랑이 노래를 불렀다. 지나간 사랑을, 다시 올 수 없는 그리운 순간들을. 사랑의 진실이 스며든 사랑이 노래를 따라 부르자 비로소 사랑의 몸이 분리되었다. 이제 사랑은 혼자서 마음 놓고 운다. 다른 사랑마저 운다면 달래줄 사랑이 없다는 걸 안다. 사랑은 혼자 있을 때 사랑의 의미를 알 나이가 되었다. 멀리서 사랑이 아파할 때 사랑의 심장 박동 소리는 가장 크다. 사랑이 웃어도 그게 온전한 웃음이 아니란 걸 아는 사랑은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사랑과 놀다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사랑 속에 무덤을 썼기에 남은 사랑은 혼자서 웃거나 울어도 외롭지 않다. 남은 사랑마저 세상을 떠나고 어느 날 사랑은 눈이 되어 내린다. 가장 맑고 선연한 빛으로 다시 한 몸이 된 눈이 소복이 쌓인다. 첫눈, 환한 웃음으로 혹은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눈을 뭉쳐 던지는 저 행위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아는 사랑이다. 알아서 해보는 투정이다. 오래도록 전해오는 사랑의 습관이다.
― 「사랑의 습관」 전문
올라가는 자세로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한결같이 고개를 들고 배에 힘을 주고
언젠가 벼랑을 걸머진 나무에게서 배운
저자세는 내가 나를 업어서 생기는 자세
그러면 당신은 내려가는 자세로 올라옵니다
무릎을 굽힐 때의 당신을 업고 있습니다
감정의 간격이 일정하게 평행이 되는 곳에서
그러므로 당신과 나는 서로를 장식하는 액자가 됩니다
삐뚠 건 풍경이 아니라 시선이었던 거죠
당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꿈의 일지가 나온 순간
계단의 도면이 지금 여기 우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길이 막힌 빗물은 자신을 통로로 씁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겨울에서 봄으로 당신,
아슬한 마음의 난간을 잡고 걸어온 거죠
하늘은 높고 목련은 기댈 데 없는 눈빛입니다
툭 떨어진대도 이상할 것 없는 계단의 하루
시간을 펴면 경사가 완만해질 거야
당신은 어제의 실패를 계단 앞에 꿇립니다
때로 평지가 된 듯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죠
늘 그 자리에서 사방(四方)을 배웅하는 들꽃처럼
가만히 서서 손바닥을 들여다보다 문득
서로의 난간을 잡았던 순간이 생각나면 그래요,
우린 그 마음을 따라 올라가거나 또 내려갈 겁니다
삐뚠 건 난간이 아니라 계단이었던 거죠
계단이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었던 거죠
― 「평행이론」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