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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영화/드라마 > 영화사
· ISBN : 9791159054532
· 쪽수 : 462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서론 싸우는 신체
1. 냉전 아시아라는 연대와 적대의 장
2. 트랜스/내셔널 시네마-영화, 국가와 자본
3. 국가, 폭력, 법에서 시장까지-동아시아 액션영화의 계보
4. 아시안 마샬 아츠 필름-만국의 노동자여, ‘감각’으로 단결하라!
제1장 대륙물과 협객물, 무법과 범법 한국-액션영화의 원천
1. 한 불온시인의 꿈의 지리-김포, 반쪼가리 국제성의 이름
2. 혁명과 쿠데타의 봉합-제3공화국의 성립과 폭력의 기원
3. 만주물-장르로 묻고, 역사에서 배우기
4. 두 적에 맞서-반공와 항일
5. 협객물-‘혁명재판’과 정치 깡패
6. 한국 액션영화에서의 폭력의 계보
제2장 국민의 경계, 신체의 경계-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시마 나기사의 ‘전후’
1. 패전과 독립-사라진 일본인과 도래할 일본인
2. <라쇼몽>-도래해야 할 과제로서의 ‘보편’
3. <살다>-‘살기’ 위한 망각
4. <잊혀진 황군>-질문으로서의 ‘보편’
5. <교사형>-사형수와 병사의 등가성
6. 아시아적 신체와 국가
제3장 전후 한일의 신체장애영화-망각과 분단의 신체표상
1. 전후 평화국가와 포스트 식민 분단국가의 영화적 신체
2. <쌀>-상이군인과 ‘군법’ 국가의 생성
3. <자토이치>와 <독비도>-맹인과 외팔이라는 정체政體
4. <세이사쿠의 아내>-촉각의 공동체, 연인의 공동체
5.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와 <삼국대협>-환희 없는 복수, 우스꽝스러운 슬픔
6. 대한민국과 전후 일본, 국가 공동체의 창출과 붕괴
제4장 ‘아시아 영화’라는 범주-아시아 영화제와 합작영화
1. 내셔널 시네마라는 ‘국제적’ 장치
2. ‘아시아’를 둘러싼 문화정치적 기획
3. 1962, 서울, 아시아 영화제
4. 합작 스펙터클 시대극의 흥망성쇠
5. 관객 구성체의 변화-아시아 관객 취향의 구조 변동
6. 오래된 아시아와 새로운 아시아
제5장 트랜스/내셔널 아시아 액션영화-중공업 하이 모던 신체의 증식
1. 도시 하위 계급 남성, 공유하는 관객
2. ‘양강’을 둘러싼 국제적 우애
3. ‘협’과 ‘산업’, 산업화 시대의 아시아적 공통성
4. 트랜스/내셔널 아시아 액션영화
5. 이소룡과 모방하는 신체들
6. 아시아라는 환승역, 세계성이라는 종착역
결론 익명의 상품을 향하여
참고문헌
사진 차례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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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사
저자소개
책속에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들, 특히 액션영화에 한정지어 말하자면 이 텍스트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개별 일국영화사 안에서 거의 이야기된 바가 없다. (…중략…) 간단하게 말해서 이들 예외적 이름을 제외한 액션영화는 하위 계층 남성들의 값싼 오락물로서 존재했다.
종종 이 영화들은 노골적으로 국가의 시책을 전파하거나, 문화자본가들의 전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하위계급 남성의 영화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젠더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렇다면 이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 영화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수많은 바이어스를 가지고 있으며, 아마도 여기에 대해 가장 취약한 문화 산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영화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한편 하위계급 남성들의 열망을 (미묘한 반발과 과잉을 통해) 최대치까지 드러낸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 열망의 한계치를 탐사할 것이다.
종종 이런 영화를 접한 영화학자들은 ‘내셔널리티’를 거의 짐작할 수 없는 이 영화들의 상태 때문에 당황하게 된다. 나의 경험을 말하자면, <맹수>의 등장인물들은 영어로 말하고 있었고 <팔 없는 검객>의 주인공들은 유창한 독일어 사용자들이었다(그리고 영어 자막이 달려 있었다). <귀문의 왼발잡이>의 주인공들은 프랑스어에 능숙했다. 이와 같은 영화들을 이런 상태로 만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1970년대 중반 이후(구체적으로는 이소룡 영화의 서구에서의 붐 이후) 형성된 ‘아시안 마샬 아츠 필름’ 팬덤은 이 구해 볼 수 없는 영화를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대면하게 한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의 개별 국가 안에서는 아카이브의 희귀한 장서가 된 영화들이, 유럽과 미국의 노천에서 그들의 언어가 입혀진 채로 흘러 넘쳐, 지금 다시 여기로 재귀해 있다.
전 세계의 하위 계층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 플랫한 소비 속에서 영화는 드디어 내셔널 영화의 그 어떤 위계도 없이, 진정한 ‘공통성’의 형태를 얻었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 노동자들의 (무의식적인) ‘감각적’ 단결과 전 세계 자본의 순환이 함께 거기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영화의 명제, 산업이자 예술로서의 영화는 상품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얻은 순간, 비로소 세계성의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 ‘아시아’ 상품은, 다른 아시아의 상품들처럼 저임금 노동의 값싼 상품이라는 점에서 경쟁력을 지녔다. 그리고 이 소비에 내셔널리티를 염두에 두는 자는 거의 없다. 누가 당신의 셔츠가 메이드 인 베트남인지, 메이드 인 대만인지, 메이드 인 코리아인지 신경 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