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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과학소설(SF) > 한국 과학소설
· ISBN : 9791159257094
· 쪽수 : 141쪽
· 출판일 : 2021-12-27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세상 끝 아파트에서 유령을 만나는 법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단지를 빠져나온 뒤 곧바로 뒷덜미에 손을 올려 텐서칩을 켰다. 확장현실 플랫폼이 작동하자 세상에 빛이 되돌아왔다. 시험 삼아 왼 손목을 들어보니 텐서칩 컨트롤 디스플레이가 떴다. 화질 깨끗한 XR 영상이었다.
버스에 앉아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스치는 거리를 멍하게 구경했다. 밤을 맞이한 서울은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가로등은 밝고 화사한 빛을 덧입었고, 간판에는 반짝반짝 생기가 돌았다. 어두운 밤에도 현수막은 차분하고 뚜렷한 색으로 자기를 주장했다.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그림이 거리 구석구석에서는 물론, 때로는 하늘까지 가로질러 떠올랐다. 텐서칩은 내 단골 가게나, 맞춤한 추천 카페에 하이라이트를 쏘기도 했다. 합정이나 신촌이라면 세련된 음악도 들려줬겠지. 그런 홍보 서비스는 꽤 비싼 탓에 어지간히 돈이 도는 거리가 아니면 흔치 않았다.
그걸 고려하더라도, 베니스힐 아파트 단지와 단지 바깥의 서울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베니스힐 아파트는 이런 생동감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아파트가 선 거리마저 고즈넉했다.
J는 부모와 다퉜던 적도 없고, 욱해서 가출할 성격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밝히긴 곤란하지만, J는 어지간히 술이 세서 곤드레만드레한 채 물에 빠졌을 리 없다는 것. 애초에 경찰은 J가 어디서, 어떻게 술을 구했는지 밝히지 못했다는 것. 사건이 마무리된 직후에 그 가족, 그러니까 부모와 동생이 조용히 아파트를 떠났다는 것.
내키는 대로 쏟아내다 보니, 딱 부러지게 짚어 수사 결과를 반박할 이유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J다운 죽음이 아니었고 어딘가 석연치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쌤은 내 이야기를 묵묵히, 끝까지 다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수상쩍지만 그게 뭔지는 모른다는 이야기네. 확실한 단서도 없고.”
“그래서 말했잖아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 탓에 뒷문이 생겨버렸지 뭐야. 차단망을 우회해 텐서칩에 접속할 수만 있으면 기술보호구역 안에서도 확장현실을 쓸 수 있다는 뜻이지. 지금 우리가 가지러 가는 장치가 바로 그 바이패스 디바이스고.”
“재즈, 그거 알아요?”
“뭘?”
“지금 이야기, 반도 이해 못하겠어요.”
재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쉽게 풀어 설명했는데 모르겠다니,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제대로 안 들었지? 무슨 생각을 혼자 그렇게 해? 나 외로워서 죽겠는데?”
“참, 재즈는 너무 시끄러워요. 대중교통 탈 때는 주변 배려해서 좀 조용히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재즈는 다시 머리를 저었다.
“역시 아직은 XR에 익숙하지 않나 봐. 채널을 너한테만 열어놓았다니까? 지금 여기서 나 보이는 건 너뿐이야. 내 목소리도 너한테만 들리고. 그러니까 그런 꽉 막힌 에티켓은 너만 잘 지키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