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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0870091
· 쪽수 : 243쪽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김필립
불맛
뻥튀기 먹는 남자
쿠마토
그 사이를 지날 때
흐르는 강물 위로 꽃은 지고
연둣빛 편지
언어가 감정을 지배하는 방식
담장
고양이가 사는 집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밤이 지나고 희붐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호드기 소리를 내던 바람도 꼬리를 감추고 잦아들었다. 산에 빼곡한 소나무는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마다 검은빛으로 뒤덮였다. 붉은 불꽃은 가라앉고 군데군데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꺼지지 않은 불씨들은 낙엽 더미에서 벌건 몸을 감추고 연기를 피워댔다. 불이 휩쓸고 간 자리마다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불이 남긴 상처는 생각보다 크고 깊었다. 수십 년 수백 년을 자란 나무들이 불에 타버렸다. 산 위에서 헬기가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낮게 비행을 했다. 뒷불을 잡기 위해 날이 밝자마자 물주머니를 단 헬기 두 대가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물주머니에서 폭포수처럼 수직으로 물이 낙하했다.
동생들을 공부시키면서 아버지 산소를 친구 집 드나들듯 찾아갔다. 그럴 때마다 힘을 얻어 오곤 했다. 덤불숲이 이어진 소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산소가 있었다. 아버지, 하고 몇 번 부르면 서러움이 저만큼 멀어져가는 듯했다. 어떤 날은 새벽녘에, 어떤 날은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또 어떤 날엔 별이 초롱초롱 박힌 밤에, 혹은 바람이 몹시 시리게 불던 저녁에, 대답은 없지만 위안을 주는 그곳으로 달려가곤 했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한 상태에서도 다시 용기를 얻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면 두려움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소주 한 병 들고 가서 아버지 한 잔, 저 한 잔 마시다 보면 그곳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어릴 때 그렇게 무섭던 산소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았다.
닭이 천 마리 넘게 땅속으로 사라진 이후로 이 마을에는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산속에서 그 소리가 들린다, 땅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그곳을 지나칠 때면 죽음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살 썩는 냄새, 비릿한 닭똥 냄새가 났다. 검붉은 핏물이 땅에 스며들어 물줄기와 합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날 춘복은 일당을 받고 닭 잡는 일을 했다. 백 포대 넘는 자루를 차로 실어 날랐다. 그날 밤 손끝에서 닭이 파닥거리는 느낌에 잠을 설쳤다. 그 증세는 며칠간 이어졌다. 방역차를 타고 온 직원은 산 전체를 뒤덮고 남을 정도로 뿌연 소독약을 뿌려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속, 기계음만 들리는 그 속에서 고립된 죄인처럼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