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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3024958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21-06-18
책 소개
목차
06. 최서진
07. 호구
08. 약속
09. 편지
10. 써니사이드 업
저자소개
책속에서
독일로 가야겠다. 5분 전까지 해인이 하던 생각이었다.
서진이 떠나야 된다면 나도 떠나면 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어디든 내가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곳에 있으면 된다. 더는 매인 계약도, 부양할 가족도, 지켜야 할 의무도 없으니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태희는 지구 반대편까지도 갔는데, 독일이 뭐 저세상도 아니고 조금 먼 지방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영어도 독일어도 못하지만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말하자. 서진에게 같이 가고 싶다고 하자. 독일이든 어디든 네가 있는 곳에 나도 함께 있고 싶다고. 아마도 서진은 틀림없이 반겨 줄 것이다.
그 특유의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띠며.
“……너 누구야?”
해인의 질문이 떨어지자 서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대로 복도에 우뚝 서서 잠시간 해인을 응시하던 서진이 말없이 뚜벅뚜벅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한 손엔 피처럼 붉은 장미 다발이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엔 유명 베이커리의 로고가 새겨진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꽃다발을 콘솔 위에 내려 둔 서진이 몸을 돌렸다. 처음 보는, 가면 같은 낯선 얼굴로 해인을 내려다보며 고저 없이 말했다.
“그러게, 왜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함부로 사람을 집에 들여.”
차라리 변명이라도 했다면, 아니라고 부정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모든 내막이 다 들통난 영화 속 악당처럼 낭패한 척이라도 하며 조금이나마 자조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하다못해 멍청하게 속아 넘어간 저를 조롱하고 비웃기라도 했다면 이 정도로 충격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서진은 감정 하나 없이 하얀 얼굴로 기계처럼, 누군가 쥐여 준 대본 속 대사를 읊는 발연기 배우처럼 말 한마디로 간단하게 모든 의혹을 인정했다. 그건 해인의 예상 범위에 없는 반응이었고 해인이 모르는 서진이었다.
모르는 사람.
머릿속이 하얘지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해인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해인을 가만히 쳐다보던 서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해인이 무의식중에 움찔하며 방어적인 자세로 몸을 뒤로 물리자 멈칫한 서진이 쓴웃음 비슷한 것을 지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래?”
“…….”
“내가 무서워?”
무서웠다. 해인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지만 서진은 해인의 얼굴에서 답을 들은 모양이었다. 길쭉한 눈매가 매서워지며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대로 구겨진 미소를 지은 서진이 테이블에 포장 용기를 내려놓더니 안에 든 것들을 꺼냈다.
“배고프지 않아? 열두 시간 넘게 빈속일 텐데.”
여상한 음성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복숭아 타르트야.”
해인은 서진이 제게 들이미는 타르트를 보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번 더 먹으라고 재촉을 하던 서진이 직접 포크를 들어 타르트 한 귀퉁이를 잘라 해인에게 내밀었다. 해인은 서진의 손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먹고 싶지 않아.”
“일단 먹어. 먹고 얘기하자.”
“…….”
“해인아.”
“안, 안 먹는다고…….”
목이 메어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디저트나 권하는 서진이 정상 같지 않았다. 그제야 정말이구나 하는 실감이 독약처럼 몸 전체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