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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4790654
· 쪽수 : 420쪽
· 출판일 : 2020-03-05
책 소개
목차
목차가 없는 도서입니다.
저자소개
책속에서
땅이 흔들렸다. 흙 속에 묻혀 있던 망자들이 느릿느릿 잠에서 깨어났다. 멀쩡한 귀족가 후원에 시체가 이만큼 많이 있을 리 없었다. 미리 준비를 해두고 이쪽으로 유인해낸 것이었다. 그녀가 제 입술을 천천히 혀로 핥으며 달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요.”
“헛소리.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너희들이잖아?”
에니샤는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아니지, 이제 너밖에 없나.”
피어오르는 금빛 마력을 본 여자는 눈을 부릅떴다. 단순한 금빛이 아니었다. 테무르 일족이라면 짙고 눈부시게 일렁이는 황금의 마력을 모를 수가 없었다.
“대법사……!”
두려움에 찬 그녀에게 에니샤는 딱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어 나왔어?”
“…….”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독한 눈빛을 띠었다. 깨어난 시체들이 꾸물거리며 저들끼리 몸을 합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모습도, 짐승의 형상도 아닌 괴물이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죽어! 죽어버려……!!”
에니샤는 악을 쓰는 그녀를 바라보며 남은 마력을 계산해보았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카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자, 가서 처리하고 와, 카힐.”
카힐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에니샤는 뻔뻔스레 말했다.
“나 마력 없잖아.
헬라드의 요구에 에니샤는 그러겠다고 약조했다. 오늘 로드고와 하루 같이 자기로 한 것은 에니샤가 먼저 조른 것이었다. 좌우법사를 만나고 난 뒤, 참을 수 없이 그가 보고 싶었다. 아빠랑 같이 자고 싶다고 어리광 부리는 것을 로드고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책을 놓고 돌아온 로드고가 에니샤의 옆에 누웠다. 그가 자연스럽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단단한 근육질의 팔 위에서 조그만 머리통을 이리저리 굴리며 장난치다가, 후암 하품을 하였다. 로드고는 어서 자라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포근한 침구의 감촉과 로드고에게서 흘러나오는 뜨끈한 열기가 절로 잠을 불러왔다. 에니샤는 쏟아지는 졸음에 금세 파묻혀버렸다.
잠들기 직전 가물가물함 속에서, 문득 그에게 해주지 못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늘이 지나면 왠지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생각났을 때 꼭 말해야겠다 싶어서, 에니샤는 눈을 감은 채로 웅얼거렸다.
“있죠, 나 옛날에 고아였어요…….”
말하고 보니 참 뜬금없는 소리다 싶었지만, 그래도 꺼낸 김에 끝까지 말하였다.
“아르커스가 가족이 되었을 때도 좋았고, 히페리온이 가족이 되었을 때도 너무 좋았는데…….”
에니샤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아빠는 한 명뿐이에요.”
너무 작게 속삭인 탓일까. 로드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천천히 잠에 빠져들고 있는데, 근사한 저음이 들려왔다.
“……그래.”
짧은 대답이었지만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왠지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에니샤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잠들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대법사.”
손에서 힘이 풀렸다. 에니샤는 기어코 사자 동상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용맹스러운 히페리온의 사자는 흙바닥에 처박혀버렸다.
벨루안은 모든 사람 앞에서 에니샤의 정체를 공표함으로써, 더 이상 히페리온의 막내 황녀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결코 이런 식으로 밝히길 원하진 않았다…….
에니샤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벨루안과 녹시타의 손에서 마력이 번쩍이고, 사위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는 하늘에서 태양과 같은 빛이 쏟아졌다. 날개를 펼친 아르커스 마법사들의 빛이었다.
허공에 속속들이 나타난 100명의 원로마법사는 일제히 마법을 전개했다. 그들이 그려낸 마법진에 좌우법사의 마력이 더해지며, 오색 빛의 거대한 새장이 나타났다.
벨루안이 피맺힌 목소리로 외쳤다.
“이것이 아르커스의 뜻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땅에서 발이 떨어졌다. 허공에 떠오른 몸은 보이지 않는 밧줄에 묶인 듯 빠르게 끌려갔다.
“……!!”
에니샤는 본능적으로 로드고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급히 손을 뻗어왔다. 있는 힘껏 로드고의 손을 잡으려 하였으나, 간발의 차로 손끝이 스치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끌려간 몸은 새장 안에 곤두박질쳤다. 활짝 열려 있던 새장 문이 굳게 닫혔다.
로드고가 이때껏 들어본 적 없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에니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