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91164799886
· 쪽수 : 350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싫은 타입이다.
약속 장소인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녀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나기사가 조금 늦었음에도 불안한 기색 없이 그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마른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랗고 빨간 가방을 멘 모습이 마치 가출한 아이 같았다.
하긴, 법적으로도 돌봐줘야 할 범위에 있는 친척 아이이기는 하다. 게다가 어른으로서 지켜줘야 할 미성년자.
즉, 나기사가 보호해 줘야만 하는 어린 소녀다.
그러나 감싸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소녀는 가엾은 아이 그 자체였다. 언뜻 보기에도 학대를 받은 양, 독특한 어둠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기사는 남의 동정을 받는 것도 싫었고, 자신에게 동정심을 들게 하는 일이나 사람도 싫었다.
“닮았네.”
그것이 나기사가 소녀, 이치카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삐뚤어져 있던 중학교 시절의 사오리와 정말 꼭 닮아 있었다.
“닮았어, 엄마랑.”
한번 더 말을 건넸지만 이치카는 반응이 없었다. 안 들리나 싶어 한 발 다가가자, 이치카는 무표정 그대로 나기사를 올려다보았다. 나기사를 보는 눈에도 감정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기사는 왜인지 비난을 받는 듯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눈은 불쾌하기까지 했다.
“따라와.”
나기사는 짧은 한마디를 던진 다음, 이치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바다라……. 듣기만 해도 좋네.”
누구한테 하는 말이 아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 바다 좋아해요?”
아키나와 캔디 사이에서 당황해하던 남자가 나기사의 말에 반응했다.
그 모습에 삐친 아키나는 자기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바다를 갔었어.”
나기사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그런 학교 있지.”
“맞아, 난 호수였는데.”
남자 상사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바다였어.”
어느 새인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나기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선 계속 어떤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
왜 나는 남자 수영복일까. 왜 여자 수영복이 아니냐며 울었지. 그 이후로는 안 갔어.”
지금도 그때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눈부신 태양, 갈 곳 없던 분노도.
나기사가 말을 끊자 객석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녹은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래서 언젠가 가고 싶어, 바다에.”
나기사는 그때의 바다를 떠올리려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때는 고집스럽게 바다에 시선을 주지 않았으니까.
그걸 떠올린 나기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 여기서 웃어도 돼? 웃으면 인성 쓰레기인가?”
남자 상사가 당황한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기사의 이야기가 남긴 잔잔한 여운은 확실히 이 자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갑자기 분위기가 우울해졌어. 나기사답네.”
조금 전까지 뿌루퉁해 있던 아키나였지만, 재빨리 나서 분위기를 이어가 주었다.
“있지, 있지. 그런 게.”
마마가 대화를 이어갔다. 캔디가 재빨리 받아쳤다.
“아니, 마마는 없잖아. 있어도 전쟁 전 아니야?”
“어른 놀리는 거 아냐.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난 여자로 살고 있었으니까.”
마마가 캔디의 등을 기세 좋게 두들기자, 비로소 이 자리에 필요한 유쾌한 대화가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