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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도가철학/노장철학 > 노자철학
· ISBN : 9791165398941
· 쪽수 : 558쪽
· 출판일 : 2021-10-29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道經
제1장
무는 만물의 시작이며 직관으로 보아야 한다
제2장
사물의 분별 없음. 어떤 성정이나 의도가 없다
제3장
현명하다는 것을 경계하라
제4장
비어있으나 차지 않음, 천제보다 먼저
제5장
움직이면 더욱 커짐, 잦은 사용은 막힌다
제6장
계곡의 영험함, 암컷의 문
제7장
애써 삶을 좇지 않음, 내가 없음
제8장
善은 물과 같다. 고요함으로 허물이 없다
제9장
과함은 그만둠만 못하다, 이루고 물러남
제10장
부드러움에 이름, 마음 수양, 세상 구제
제11장
有의 이로움은 無의 쓰임에 있다
제12장
외부에 현혹되지 말고 내면에 충실하라
제13장
자존심을 지키고 몸을 소중히 하라
제14장
물질과 형태 없음, 홀망, 道를 아는 실마리
제15장
고요함으로 맑아지고 느긋하게 살아 감, 화려함을 덮고 끝까지 이루려 하지 않음
제16장
자연섭리로 돌아감, 깨달음, 수용, 무분별. 道에 이름
제17장
임금 존재조차 모르는 최고의 다스림, 내가 저절로 그리됨
제18장
도가 없어지자 인의가 생기고 지혜가 있어 거짓이 나옴
제19장
지혜를 버리고 소박함과 질박, 사사로움과 욕심
제20장
세상 사람과 달리 나 홀로 어둡고 어리석구나
제21장
道는 어스름하지만 매우 참된 정기가 있다
제22장
굽히면 온전해진다
제23장
일을 즐겁게 한다는 것은 그 안에 도가 함께함이다
제24장
발을 돋우고 오래 서지 못함, 군더더기
제25장
道는 크다. 道는 저절로 그러함을 따른다
제26장
가벼우면 근본을 잃고 조급하면 군주자리를 잃는다
제27장
道에 바탕을 둔 걸음이 흔적이 없음, 道를 모르는 보통 사람, 깨달음으로 인도,
반쪽만 이해한 善
제28장
강함이라는 것을 알면서 부드러움을 지켜라
제29장
사물은 앞서기도 뒤따르기도 함
제30장
천하에 무력을 사용치 않음, 강해진다는 것은 늙는 것
제31장
병기는 상스럽지 못한 물건, 상례로서 대함
제32장
그침을 앎으로써 위태롭지 않다
제33장
남을 아는 것은 지혜롭지만 내면을 아는 것이 깨우침이다
제34장
위대하다고 여기지 않기에 정작 위대하다
제35장
도를 지키면 이에 편안함이 크다
제36장
움츠러들려하는 것은 오랫동안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미세한 작용에 대한 깨달음
약한 것을 가까이 하며 강한 것에 현혹되지 마라
제37장
道는 무위라 만물이 스스로 그렇게 되고, 고요함으로 만물이 저절로 안정된다
德經
제38장
덕에 오름은 무위이다. 예의라는 것은 충신과 믿음이 기대는 곳으로 어지러움의 원흉이다
제39장
하늘이 맑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장차 무너질까 두렵다.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는다
제40장
되돌아감이 도의 운동이고 약함이 도의 작용이다
제41장
道는 명료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밤하늘 혜성과 같다. 德이 높아 보이지만 낮은 계곡과 같다.
善으로 시작하고 善으로 이룬다
제42장
혹 덜어지더라도 채우려하지 말라. 너무 좋기만 한 것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제43장
無가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을 도와준다
제44장
이름과 몸 중 어느 것이 나와 가까운가?
제45장
크게 이루어진 것은 흠결이 있는 듯 보이나 아무리 써도 낡아지지 않는다
제46장
지금의 족함이 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항상 족한 것이다
제47장
문밖에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
제48장
도는 덜어냄이다. 무위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
제49장
道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善으로 대한다. 세상의 마음과 같이 한다
제50장
삶을 인위적으로 만들려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51장
누가 지위를 준 것도 아닌데 항상 저절로 그렇다. 현덕
제52장
그 자식을 알고 어미를 지키면 道가 내 몸에 스며들어 위태롭지 않다. 습상
제53장
나에게 길을 알려 달라고 하면 큰 길로 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산골짜기 샛길만 좋아한다
제54장
도에 바탕을 두며 세운 것은 뽑히지 않고, 도에 바탕을 두어 보존하는 것은 변하지 아니한다
제55장
순수함이 두터움은 갓난아기와 같다. 조화를 常이라 하고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제56장
감각의 구멍을 막고 외부(욕망)의 문을 닫으라
주관의 날카로움을 꺾고 마음의 어지러움을 풀어라
스스로 빛남을 순화하고 세속과 같이 하라
제57장
내가 무위하고 고요함을 좋아하며 작위적으로 일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면
백성들이 스스로 안정되며 부유해지고 질박해 질 것이다
제71장
자기 근원을 알고 있지 못한 것을 알면 높게 보지만,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자체도 모르면 그건 병이다
제72장
백성이 의식주를 막지 말고 생명을 누르지 말라
제73장
하늘의 그물은 넓어 엉성한 듯하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
제74장
죽음을 관장하는 사람(하늘)을 대신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목수를 대신해 나무를 깎는 것과 같다
제75장
사람들이 천박하게 죽는 것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제76장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뻣뻣하고 굳어진다
제77장
하늘은 남는 데서 덜어내고 부족한 곳에 보태주지만
사람은 모자란 곳에서 덜어내 남는 곳에 더 보태준다
제78장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은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제79장
큰 원한을 화해해도 찌꺼기가 남는다면 어찌 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제80장
나라가 작고 백성도 적다면?
제81장
사람에게 행하면서 자기에게 유위(有爲)가 있는가를 걱정하고
사람에게 베풀면서 자기에게 많은 것을 걱정한다
참고문헌
책속에서
不以其無私與(불이기무사여)의 私가 앞서 身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간단히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상공과 왕필 모두 ‘사사로움’으로 주석을 하고 대부분의 우리나라 번역서도 이에 따르고 있다. “사심(사사로움)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작은 사사로움을 버리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등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이 석명은 이 부분을 “‘나’를 주장함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나’를 주장하지 않기에 ‘나’를 이룰 수 있다”고 번역을 하고 있다. 사사로움이든 ‘나’든 앞 문장에서 없다(無)라고 말하고 바로 뒤에서 그것을 이룬다고 말하니 앞뒤의 논리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앞에서는 私를 사사로움으로 읽고 바로 뒤 문장에서는 ‘나’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또한 글자 사용에 일관성이 없다.
私는 앞의 身(몸)이란 말이 별도로 있기 때문에 ‘자기(몸)’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 아니다. 私는 눈에 보이는 자기 몸뚱이(其身)를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는 그런 ‘나’를 의미한다. 其는 앞에서도 육체적인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 글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육체라는 것(其)이 아니기 때문에(不以) 그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내가(私) 없는 것(無)이 되지 않겠느냐(與)?”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몸을 육체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기 때문에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나(私)’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與(여)은 문장 끝에서는 의문형 어조사로 쓰이고 있다.
_제7장 不自生, 无私
일반적으로 1장에서 37장까지를 道經(도경)이라고 부르고 여기서부터 德經(덕경)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왕필본에 따른 것이며, 백서본에는 반대로 德經이 먼저 나오고 道經이 뒤에 나온다. 더욱이 죽간본은 또 다른 순서로 되어 있다. 내용도 덕경이라 해서 모두 德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주제가 뒤섞여 있다. 일천한 필자가 보기에는 비슷한 내용끼리 묶어 순서를 나열하면 독자들이 읽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은데 이미 오래전부터 이미 굳어져 있는 터라 왕필본의 순서에 따랐다.
먼저 德이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자. 51장에서 “道는 만물을 낳게 하고 德은 만물을 기른다(道生之而德畜之)”라 하고, 이어 “만물은 道를 존중하고 德을 귀하게 여긴다(萬物尊道而貴德)”라 하여 道가 위에 있고 그 아래 德이 별개로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10장에서는 “낳고 기르고 낳았지만 소유하지 않고 베풀지만 주재(主宰)하지 않는 것을 현덕(玄德)”라 하여 德이 道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며, 23장에서는 “道는 德과 함께한다(道亦德之)”라 말하고 있으며 28장에서도 德을 道에 비유하던 갓난아기, 골짜기, 통나무 등에 직접 비유하고 있음을 볼 때 道와 德의 위상(位相) 차이는 없고 道와 직접 연계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_제38장 上德无爲, 禮者 忠信之泊 而亂之首
屬耳目(속이목)이 을본과 왕필본은 注(주)로 되어 있으나 두 글자가 서로 통하여 그냥 ‘귀와 눈을 기울이다’라고 번역해도 차이가 없다. 백성들이 성인과 함께 있으면서 자기들과는 어딘가 다른 것 같아 성인의 말과 행동에 귀와 눈을 기울인다. 항상 오냐오냐 하면서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을 내세우지 않으니 그에 대한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그들을 어린아이로 대한다는 것은 그들을 어리석고 무지한 것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질박하게 본다는 의미이다. 天下渾心(천하혼심)이 그러한 마음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기존의 주해서나 번역본들은 도덕경의 성인을 백성을 교화시키고 베풀어주며 백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비로운 사람으로 많이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노자의 성인은 그렇지 않다. 5장에서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들을 풀 강아지로 본다고도 했다. 2장에서도 어떠한 행위도 없이 자연 상태에 맡기며 일일이 말로써 설명하면서 가르치지 않는다고(居無爲之事 行不言之敎) 했다. 사람들이 보면서 스스로 느끼고 깨우치기를 원할 뿐이다. 백성들을 어떻게 교화시키고 인도하겠다는 베풀음이라는 것도 有爲(유위)뿐이다. 그러나 아기를 비유로 든 것은 앞으로 道를 체험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_제49장 不善者亦善之, 爲天下渾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