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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한국고대사 일반
· ISBN : 9791166841910
· 쪽수 : 448쪽
· 출판일 : 2023-11-20
책 소개
목차
四권목차
(삼국유사고증 하1)
삼국유사 권제3(三國遺事 卷第三)
흥법 제3(興法 第三)
흥법 제3興法 第三 _17
난타벽제難陁闢濟 _31
아도기라阿道基羅 _38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猒髑滅身 _73
법왕금살法王禁殺 _106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_110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 _134
탑상 제4(塔像 第四)
탑상 제4 塔像 第四 _141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_141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 _149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_160
고려영탑사髙麗靈塔寺 _167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 _170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_181
황룡사종•분황사약사•봉덕사종皇龍寺鍾•芬皇寺藥師•奉德寺鍾 _194
영묘사장육靈妙寺丈六 _199
사불산•굴불산•만불산四佛山•掘佛山•萬佛山 _201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 _208
흥륜사벽화보현興輪寺壁畫普賢 _211
삼소관음 중생사三所觀音 衆生寺 _214
백률사栢栗寺 _225
민장사敏藏寺 _234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舎利 _237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彌勒仙花•未尸郎•眞慈師 _269
남백월이성•노힐부득•달달박박南白月二聖•努肹夫得•怛怛朴朴 _282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 _299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_302
어산불영魚山佛影 _321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_339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寳叱徒太子傅記 _369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 _375
남월산南月山 _381
천룡사天龍寺 _397
무장사 미타전鍪藏寺彌陁殿 _406
백엄사 석탑 사리伯嚴寺石塔舎利 _412
영취사靈鷲寺 _418
유덕사有德寺 _422
오대산문수사석탑기五臺山文殊寺石塔記 _426
후기 _429
저자소개
책속에서
고려본기를 보면 ‘소수림왕의 즉위 2년 임신은, 곧 동진의 함안 2년으로, 효무제가 즉위한 해에 해당한다. 이해, 전진의 부견이 사자와 함께 승려 순도로 하여금,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또 소수림왕 4년 갑술에, 아도가 진(晋)에서 들어왔다. 그리고 이듬해 을해 2월에 초문사를 창건하여, 그곳을 순도에게 맡기고, 나아가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이곳은 아도에게 맡겼다. 이것이 고구려의 불법의 시초라고 한다.
처음 찰주를 세우는 날에, 공장이 본국 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꿈꾸었다. 공장은 곧 의심이 나서 손을 멈추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어두컴컴한 속에서 한 노승과 한 장사가 금전문서 나와, 곧 그 기둥을 세우고, 노승과 장사는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찰주기(刹柱記)에는 “철제 노반 위의 높이가 42척이고 이하는 183척이다.”라고 했다.
자장이 오대에서 받은 사리 100알을, 기둥 안과 통도사 계단과 태화사 탑에 나누어 안치하였는데[일찍이 중국에 유학을 갔을 때, 지나던 대화지의 신인(神人)과 그 아들인], 이것은 호법룡의 청을 따른 것이다.
제54대 경명왕 때, 흥륜사 남문과 좌우 낭무가 불에 탄 채 아직 수리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정화와 홍계 두 스님이 장차 시주를 모아서 수리하려고 하였다. 정명 7년 신사 5월 15일에 제석이 절의 왼쪽 경루에 내려와서 10일 동안 머무르니. 불전과 불탑 및 풀과 나무 흙과 돌들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구름이 절을 덮으며 남쪽 못의 어룡이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보고 전에 없던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옥과 비단과 곡식을 산더미처럼 시주하였다. 공장(工匠)이 스스로 와서 며칠 안 되어 그것을 완성하였다. 공사가 끝나자 천제(天帝)가 막 돌아가려고 하니. 두 스님이 아뢰기를 “천제께서 만약 궁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란다면, 성스러운 모습을 그려서 지성으로 공양하여 천은을 갚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로 인하여 영상을 남겨서, 오랫동안 아래의 세계를 진호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천제가 말하길 “나의 원력(願力)은 보현보살이 두루 현화를 펴는 것만 같지 못하니, 이 보살상을 그려서 정성스럽게 공양하여 그치지 아니함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 스님은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을 벽 사이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금도 그 상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