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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한국고대사 일반
· ISBN : 9791166841903
· 쪽수 : 416쪽
· 출판일 : 2023-09-20
책 소개
목차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2〉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 _15
만파식적萬波息笛 _51
효소대왕 죽지랑孝昭大王 竹旨郞 _61
성덕왕聖德王 _76
수로부인水路夫人 _82
효성(성덕)왕孝成(聖德)王 _89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_93
찬기파랑가왈讃耆婆郎歌曰 _101
혜공왕惠恭王 _107
원성대왕元聖大王 _116
조설早雪 _136
흥덕왕앵무興德王鸚鵡 _141
신무대왕 염장 궁파神武大王 閻長弓巴 _144
사십팔 경문대왕四十八 景文大王 _151
처용랑 망해사處容郎 望海寺 _160
진성여대왕 거타지眞聖女大王 居陁知 _170
효공왕孝恭王 _177
경명왕景明王 _181
경애왕景哀王 _184
김부대왕金傅大王 _187
남부여·전백제南扶餘·前百濟 _231
무왕武王 _248
후백제 견훤後百濟 甄萱 _255
가락국기(1)駕洛國記(1) _326
가락국기(2)駕洛國記(2) _345
가락국기(3)駕洛國記(3) _360
가락국기(4)駕洛國記(4) _385
보유補遺 _399
‘삼국유사해제’ 보유 _407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는 일찍이 스승이 만들었다는 기파랑을 찬양한 사뇌가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노래의 풍취는 매우 격조가 높은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사뇌가는 정말 스승이 만드신 것이 틀림없는가?’
충담사가 ‘그러하옵니다.’라고 대답하자, 왕은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다스리기 위한 노래를 지어 주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칙명을 받고 충담은 즉시 노래를 지어 이것을 왕에 드렸다. 왕은 이것을 기뻐하여 왕사로 봉하였는데, 충담은 왕에게 정중한 예를 올리며 감사의 뜻을 나타냈지만, 그것을 받는 것을 굳이 사양할 뿐이었다. 안민가(安民歌)는 다음과 같이 부른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이에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원래의 모습을 나타내고, 왕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풍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들어와, 이후 정사를 도왔다. 이 자식은 이름하여 처용이라고 했는데, 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처용에게 시집보내,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도읍의 생활에 잡아 두려고, 한층 더 급간의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처용의 처는 유난히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병신이 그녀를 흠모한 나머지,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인기척 없는 밤에 살며시 그 집을 찾아가서, 몰래 하룻밤을 함께 보내 버렸다. 바깥에 나갔던 처용이 집에 돌아와 방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춤을 추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의 아버지 추모왕은,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는데,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이때 부여주의 왕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고, 다만 딸이 세 명 있었을 뿐인데, 주몽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고, 주몽은 이윽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비류이고 다음은 온조다. 그러나 (주몽이 북부여에 있었을 때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었기 때문에) 태자가 자기들을 배척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윽고 오간·마려 등 10여 명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이때 백성들도 이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그리고 부아악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바랐으나, 열 명의 신하들은 간하기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건대, 이 하남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비옥한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천험과 지리가 좀처럼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둘로 나누자, 그 하나를 이끌고, 결국 미추홀까지 가서, 그곳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