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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7241993
· 쪽수 : 172쪽
· 출판일 : 2024-05-31
책 소개
목차
서문…04
추천사_박연서…06
머리말_박이도…07
첫 번째 이야기
설명이 없는 아픔
―
1. 마음의 준비…13
2. 병실 사람들…17
3. 산삼 먹고 길을 나서다…22
4. 한 지붕 두 가족…31
5. 쨍하고 해 뜰 날…37
6. 서울에서 걸려 온 전화…44
7. 정동진의 태양…51
8. 다시 그 거리에 선다면…58
9. 나는 바보가 아니야…70
두 번째 이야기
새로운 출발
―
10. 다시 시작…81
11. 신학교의 새벽…87
12. 하늘을 지고 가는 길…94
13. 영혼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아이…102
14. 우리 다시 만나자…108
15. 마음의 등대…116
세 번째 이야기
다시 찾아오는 봄
―
16. 밥 먹고 가세요…127
17. 교회 마당에 봄은 내리고…134
18. 너에게 가는 길…142
19. 나의 길 나의 운명…150
20. 인생 그래프…156
발문_이지엽…166
후기…169
저자소개
책속에서
스물한 살, 21일 동안 성경책을 읽다 지쳐 잠든 새벽에 꿈을 꿨다. 풀이 무성한 묵정밭 끝에서 작은 광채가 떠올라 점점 다가왔다. 바람이 불어 옷깃이 깃발같이 휘날렸다. 태양보다 더 눈부신 광채에 눈을 가렸다.
“현준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야. 공부 못해도 괜찮아. 꼴찌면 어때. 가난하다고 주눅들 거 하나도 없어.”
“바보 같은 사람도 가장 귀하나요? 전 아무런 꿈이 없어요. 꼭 날개를 다친 어린 새 같아요.”
“성경은 마음을 바꾸지. 너의 열매를 보고 싶어. 쟁기를 잡고 인생의 밭을 갈아. 오직 너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지켜볼게. 타고난 기억력을 버리지 마. 내가 너에게 준 선물이니까.”
무섭고도 달콤한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여덟 살에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 바보로 산 날들이 필름처럼 하나둘씩 지나갔다. 아이가 사경을 헤매다 정신을 잃는 장면, 책가방에 전교 꼴찌 성적표를 넣는 장면, 선생님에게 머리를 맞는 장면, 비탈밭에 고추 모종을 심는 장면, 연탄재가 날리는 동네로 이사하는 장면, 저녁 강변에 앉아 강물을 보는 장면, 수박밭에서 땀을 닦는 장면, 어머니에게 살구를 건네는 장면… 햇살에 장면들이 하르르 부서졌다. 창문 너머 14년 만에 새로운 하늘이 밝아왔다. 물속으로 가라앉은 행복의 해를 수평선 위로 띄워 올리고 싶었다. 가난한 농부의 마음에 꿈이 생겼다.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어도 좋은 꿈이다.
평범하게 살고 싶은 여자, 목회자로 살고 싶은 남자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천주교는 무엇이며 개신교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누구며 하나님은 누구인가? 고향 마을에 성당이 있었다면 신부가 됐을지 모르고, 사찰이 있었다면 머리 깎고 승려가 됐을지 모르지만, 생각과 마음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평범한 삶은 별처럼 아득히 멀고 해나도 나도 눈이 멀어 가는 현실이 버겁다.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이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눈빛을 알아챈다.
“저짜 있어. 연탄 연기 올라온데이.”
“연탄 가는 거 궁금하단 말이야, 볼래.”
아궁이 맨 밑에 집게로 불붙은 연탄을 넣고 연탄구멍 25개에 맞춰 새 연탄 두 장을 얹었다.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연탄불을 보는 해나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약해진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면 인생이 아니겠지만 마음을 먹지 않으면 오늘을 살기 힘들다. 인쟁기를 지고 밭고랑을 내는 방법은 발 앞과 밭 끝을 동시에 보는 눈이다. 발 앞만 보면 앞으로 나가기가 어렵고, 밭 끝만 보고 나가면 옆에 밭고랑을 놓쳐 고랑은 삐딱삐딱 불규칙한 간격을 만든다. 인쟁기를 처음 지는 날, 아버지는 뒤에서 쟁기를 잡고 ‘앞으로’, ‘옆으로’, ‘천천히’, 내비게이션같이 말했다. 내비게이션 없는 연애의 인쟁기를 처음 걸머지고 가는 길은 서툴고 이별은 더 서툴다.
집 같은 집에서 하룻밤 자고 싶었다. 호텔방에 동그란 침대가 놓였다. 새벽기도를 나가는 사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침대 끝에 걸터앉은 해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별하는 방법을 몰라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다. 무릎이 눈물로 일렁였다. 담백하고 덤덤한 사람은 아니었다. 해나도 눈물을 닦으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행거가 없었지만 책임지지 못할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해나는 잠옷을 곱게 접어 자기 가방에 넣었다. 기차역에서 정동진행 기차표를 끊었다. 파도가 하얗게 밀려오는 플랫폼 벤치에 다시 앉았다. 어린 시절 강변을 걷고 산길을 걸어 집으로 오면 옷에 도깨비풀이 잔뜩 붙어 있었다. 사랑은 떼어내고 또 떼어내도 혼자서는 다 떼어내지 못하는 도깨비풀 같다. 끊어진 자리에서 이어지는 철길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그래. 어때? 눈 없는 눈으로 보는 세상이?’
‘넌 누구니?’
‘나, 마음의 소리. 넌 두렵지 않니?’
‘머가? 이제 밝은 세상을 볼 건데?’
‘눈 없는 눈으로 보는 시선들 말이야.’
‘내가 타인의 시선이 두려운 사람 같아?’
‘넌 아직 시각장애인의 고달픈 생활을 몰라.’
‘장애를 몰라도 하나도 두렵지 않아. 도지 붙이는 농사꾼, 정부미를 지고 삼각지로 걸어가던 사람이야.’
‘하하. 그러신가. 바닥 인생은 산전수전, 공중전이라지만 장애는 우주전이야. 너 부모님에게 장애인 등록한 거 말도 못 했잖아.’
‘그건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은 거뿐이야. 내가 유일하게 지켜야 할 사람들이거든.’
‘사람들이 장애인을 불가촉천민처럼 피해 가도 진짜 괜찮아?’
‘난 괜찮아. 우주의 먼지같이 살아도. 어차피 외로운 인생이잖아. 난 눈먼 새처럼 날개를 펴고 비상할 거야. 왜 더 할 말 없어? 저 불빛 우리 엄마같이 예쁘다.’
30분, 수술이 끝났다. 회복실에서 잠들었다. 안대를 벗고 0.2 시력을 되찾았다. 차번호가 선명했다. 색채의 길을 걸어 신학교로 돌아왔다. 본관 앞 회백색 바위에 새긴 영신대 표어 ‘신학과 목회’ 다섯 글자를 마음판에 새겼다. 여전히 눈 떨림 증상은 고칠 길이 없다. 글씨가 겨울 문풍지처럼 흔들리는 통에 30분 이상 독서확대경을 보기가 어려워 오디오북을 계속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