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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의 외출

명자의 외출

(이을순 장편소설)

이을순 (지은이)
청어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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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의 외출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명자의 외출 (이을순 장편소설)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553309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25-05-15

목차

작가의 말 5

1 ……… 8
2 ……… 45
3 ……… 77
4 ……… 98
5 ……… 114
6 ……… 136
7 ……… 154
8 ……… 170
9 ……… 197
10 ……… 213

저자소개

이을순 (지은이)    정보 더보기
2004년 계간 《대한문학》 단편소설 「안개숲」으로 등단. 서간집 『종이 위에 핀 꽃』 소설집 『떠도는 자들의 섬』 『고백』 장편소설 『그 여자의 방』 장편소설 『명자의 외출』 영주일보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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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앞마당으로 나온 희선은 실눈을 뜨고는 텅 빈 하늘을 더듬어본다. 한 점 구름도 없다. 저기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직박구리와 참새떼도 화르르 날갯짓하며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어쩌면 인간도 죽으면 그 영혼이 새들처럼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게 아닐까? 눈앞에서 새들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희선은 문득 인생무상을 느낀다.
어느덧 자신의 나이 육십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게 정말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늙어간다는 건 열정이 식어가는 동시에 희망마저 점점 잃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노년의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산을 넘고 넘다가 저쪽 기슭 죽음의 연못이 침잠되어 있는 곳으로 떠나는 고달프고도 슬픈 여정은 아닐까. 체력이 쇠퇴함과 동시에 기운도 쇠약해져 마침내 죽음은 친숙한 벗처럼 손을 내밀며 점점 다가오는…. 희선의 몸과 마음이 한껏 움츠러든다.
희선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널찍한 돌의자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는다. 앞마당 연못 입구에는 철쭉꽃과 살구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그때 햇살을 받아 봄빛이 가득한 연못 속으로 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 뛰어든다. 희선의 시선이 일체 그쪽으로 쏠린다.
연못은 백 년도 넘은, 그러니까 옛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동네 우물이다. 남편은 연못 주변에 느티나무와 향나무를 심고, 인동초와 찔레 장미도 심어 그 주변을 운치가 있게 조성하였다. 간혹 오일장에 가면 금붕어를 사다가 연못에 풀어놓기도 했다. 그러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그토록 운치가 있던 연못이 점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 둥그스름한 형태가 무덤처럼 보였다. 뭐랄까? 연못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이 마치 죽은 자들의 서늘한 기운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음습하고 물이 가득 고인 그 안에서 뭔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존재의 불안감. 그게 어쩜 죽음일지도 모른다. 금세 태양은 나무 잎사귀들 사이로 흩뿌려지고 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부터 자식들은 종종 마당 넓은 집을 처분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희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정원 일을 하다가 보면 공허한 시간이 후딱 지나가서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식들은 집을 팔아버리고 의료서비스와 연계된 실버타운으로 입주하라고 성화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당시에만 해도 희선은 그런 자식들의 의견에 따를까도 했다. 그러나 막상 혼자가 되어 살아보니 그 마음이 달라졌다. 아니 남편의 유언처럼 남긴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당신, 내가 없어도 정원의 나무들과 꽃들을 잘 보살펴줘. 그러다 보면 당신 홀로 살아가도 차츰차츰 남은 노년의 인생이 그다지 외롭진 않을 거야.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잖아.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그것들과 친숙해지는 법을 배워야 해. 평소 말이 없던 남편은 그날따라 희선의 손을 꼭 잡고는 당부하듯이 말을 건넸다.
공직에 근무하던 남편이 퇴직을 앞두고 있을 때만 해도 희선은 전원주택을 처분하고 아파트로 이사할 계획이었다. 전원생활이라는 게 여러모로 불편했다. 특히 여름철이면 집 안으로 날아드는 날벌레, 모기, 바퀴벌레 그리고 간혹 잔디밭을 가로질러 슬슬 기어다니는 뱀도 눈에 띌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남편에게 온갖 짜증을 냈다. 당신, 제발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요, 네? 하지만 남편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희선은 남편이 일부러 자기 말을 무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자 하루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올해 당신 퇴직하면 당장 이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해요? 그제야 남편은 아주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난 이 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왜 이토록 소중한 정원을 두고 떠난단 말이오? 난 여기서 오랫동안 살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것이니 다신 그런 말 꺼내지도 마시오. 나무들과 꽃들을 가꾸고 사는 인생이 노후에 얼마나 축복된 삶인데 어찌 나더러 그걸 버리고 다닥다닥 붙은 닭장 같은 아파트에 들어가 살자는 거요? 그 말에 희선은 발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흥! 그럼 당신이 먼저 죽어야겠네요. 그래야 내가 이 집을 팔고 아파트든 실버타운이든 입주해서 편안한 노후를 즐길 게 아녀욧!
그 후로 그 말은 으레 희선의 잔소리가 되어버렸다. 그때마다 남편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기 일에만 집중할 뿐. 그리고 일 년이 좀 지났을까. 하루는 퇴직한 남편이 정원의 나무를 자르다가 갑자기 등과 허리의 통증을 호소했다. 저번에도 남편은 통증을 호소한 바가 있었다. 다음날 희선은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이것저것 검사를 받을 때만 해도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인 줄로만 알았다. 남편은 엉뚱하게도 자신이 아마도 대상포진이 아닐까, 하고 희선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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