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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후기(영조~순종)
· ISBN : 9791169740418
· 쪽수 : 592쪽
· 출판일 : 2023-09-28
목차
*표는 기사 내용이 간단한 목차입니다.
서언 / 5
영조 이금의 생애 / 30
『영조실록』 총서 / 40
영조(1724년 8월)
8월 30일 대왕이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다 / 41
예조에서 복제와 저장·등위 및 생원·진사 이하의 의대에 관한 절목을 올리다 / 45
사간원에서 약을 잘못 쓴 어의와 이공윤을 탄핵하니 국문해 처벌케 하다 / 52
* 진시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가 있다 / 53
승정원에서 생기에 실린 입직관과 원상을 파직토록 계품하니 입직관만 윤허하다 / 53
영조(1724년 9월)
9월 1일 밀창군 이직·이진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54
표신에 새길 압자에 대해 논의하다 / 55
대행 대왕의 재궁에 옻칠을 하다 / 55
좨주 정제두가 분부하였다가 귀향하려 하자 임금이 머물도록 권유하게 하다 / 56
우의정 이광좌와 호조 판서 조태억을 인견하니 치도와 관련해 아뢰다 / 56
* 사헌부에서 해당 승지를 추고하라고 계청했던 것을 중지하다 / 56
왕위의 계승을 종묘, 사직과 영휘전에 고하는 축문에서 칭호문제를 논함 / 57
9월 2일 송인영·조원명·윤용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60
* 사헌부에서 해당 승지를 파직시키라는 계청을 정지하다 / 60
밀창군 이직의 품계를 정1품 흥록 대부로 승진시키다 / 60
9월 3일 밤 1경에 천둥과 번개가 치다 / 60
대행 대왕의 시호와 묘호·전호·능호를 올리다 / 60
서용하라는 전지를 내리지 않았는데도 정사효를 방백에 수망한 전조의 간언을 추고케 하다 / 61
* 정사효·이정제를 승지로 삼다 / 61
9월 4일 이광좌가 최규서에게 머물러 있도록 권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다 / 61
이조에서 대행대왕의 행장찬집청의 당상과 낭청을 계하하다 / 61
9월 5일 함경 감사 이의만의 본도의 사록에 대한 장문을 형조에 내려 품처케 하다 / 61
9월 6일 대상의 호복을 『오례의』에 따르게 하다 / 62
9월 7일 우승지 이정제가 사관을 보내 정제두를 유소해 오게 한 일을 중지할 것에 관해 아룀 / 63
감기 중 곡전을 행함을 이광좌 등이 만류하자 임금이 며칠만 섭행케 하고 다시 친행하다 / 64
9월 11일 국장 도감에서 제술관과 서사관 및 명정·보전문 등의 서사관 성명을 계문하다 / 65
대사헌 이명언 등이 역비를 조사해 핵실하기를 청한 일로 논하다 / 65
9월 13일 조원명을 동부승지로 삼다 / 70
9월 15일 태백성이 대낮에 미지에 나타나다 / 70
9월 16일 천둥과 번개의 이변과 관련해 승정원 등에서 치도에 있어 힘써야 할 것에 대해 아룀 / 70
산릉을 중량포에 정하다 / 72
9월 18일 밤 2경에 유성이 천진성 아래에서 나와 동쪽 하늘가로 들어가다 / 75
각사에 구임하는 관직에 한해 이광좌와 논하다 / 45
9월 20일 태백성이 낮에 미지에 나타나다 / 76
9월 21일 밤 2경에 유성이 견우성 아래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에 들어가다 / 76
선왕조의 작호와 왕자의 봉작, 부부인의 늠록 등에 관해 이광좌 등과 논함 / 76
복상을 명하여 유봉희를 우의정으로 이광좌를 좌의정으로 삼다 / 79
* 조태억을 병조 판서로 오명항을 호조 판서로 삼다 / 80
9월 22일 백성을 구제할 대책을 강구할 것에 관해 재상으로부터 목민관에게까지 하교함 / 80
서종제를 우의정 달성 부원군으로 추증하다 / 81
심단·이정제·이중술·윤회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81
좨주 정제두가 상소해 사관을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고 복제에 대해 논함 / 82
9월 23일 밤 4경에 달이 헌원성 좌각에 들어가다 / 84
영의정 최규서가 치사하다 / 84
9월 24일 밤 2경에 유성이 여성 아래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가다 / 87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각 해사의 구류인을 즉일로 판결해 석방케 하다 / 87
사대부들이 백성의 집을 함부로 점유하는 것을 거듭 금지하다 / 88
장령 유시모가 액례 중 뇌물을 받고 점퇴시킨 자를 처벌하기를 계청하다 / 88
* 조태억을 판의금으로 삼다 / 88
대사간 이명의가 어선을 관장했던 자를 출척할 것에 관해 상소하다 / 88
대사헌 이명언이 인재 등용과 붕비 타파, 군문 혁파 등에 관해 상소함 / 89
평안 감사 이정제를 서관의 방백에 제수하는 일에 대해 교리 오수원이 상소하다 / 94
9월 25일 태백성이 낮에 미지에 나타나다 / 95
이광좌가 나라에 용도를 조절하고 줄여 백성을 구제하고 나라를 살리도록 아뢰다 / 95
제전을 드린 후 간혹 신료를 인접해 강론하도록 교리 오수원 등이 차자를 올리다 / 96
총호사 이광좌가 새 능을 논하는 일로 인해 임금에게 아뢰다 / 97
9월 26일 차대를 시행하다. 승습을 청하는 주문에 영의정 이름을 쓰는 일, 김창집·이이명의 참시와 신임에 대한 소결을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다 / 98
공사와 변방의 긴급한 보고는 시간에 관계 없이 들이도록 하다 / 106
9월 27일 태백성이 한낮에 미지에 나타나다 / 106
9월 28일 김호를 정언으로 조익명을 부응교로 이거원을 교리로 삼다 / 106
소대하여 강서하려 하므로 영사 이광좌에게 물어서 결정하다 / 106
이거원이 상소하여 역비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의 일에 대해 토죄할 것을 임금께 청함 / 107
9월 29일 지평 이진수가 영덕 현령 홍정보를 쫓아내려 한 서리와 노복 등을 효시할 것을 청함 / 108
밤에 소대하여 『강목』의 양기를 강하였다. 김씨 성의 궁인 일에 관해 박필몽 등과 논함 / 109
9월 30일 평안 감사 이정제가 임금을 사폐하고 부임함 / 111
차대를 행하다. 이광좌, 유봉휘 등이 언로를 여는 것 등에 관해 아뢰다 / 111
정석삼·윤동원·이보욱·김일경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115
- 이하 목차 생략 -
책속에서
서언
영조실록은 1724년 8월부터 1776년 3월까지 영조의 재위 51년 8개월 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127권 83책. 활자본. 정식 이름은 ‘영종대왕실록’입니다.
1889년(고종 26년)에 ‘영종’의 묘호를 ‘영조’로 추존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추존한 묘호에 따라 ‘영조실록’이라 통칭하고 있습니다.
영조가 죽은 2년 뒤인 1778년(정조 2년) 2월에 영종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에 착수해 3년 6개월 만인 1781년 7월에 완성, 오대사고에 보관하였습니다.
총재관은 김상철·서명선·이은·이휘지·정존겸이고, 도청당상은 이휘지·서명응·황경원·이복원·채제공·조준·김종수·유언호·이성원·이명식·이연상·정일상·김익·김노진·김이소·서유령·윤시동입니다.
각방당상은 정민시·홍낙명·서호수·오재순·정광한·이재간·정창성·조시준·홍낙성·권도·정호인·이재협·서유경·이의익·이치중·이경양·오재소·이병모·김화진·정상순·김하재·이진형·채홍리·심염조·정지검·홍양호·홍검 등입니다. 도청낭청은 박종래 등 19명, 각방낭청은 윤행수 등 58명, 등록낭청은 오태현 등 37인, 분판낭청은 정익조 등 30명입니다.
영조실록은 조선왕조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재위한 영조가 즉위하여 죽기까지 반세기가 넘는 51년 8개월 간에 있었던 정치·외교·국방·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이 연월일순에 따라 편년체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영조대는 탕평책의 실시로 왕권이 안정되고 균역법 등의 새로운 제도가 실시된 때였습니다. 또한 국방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지고 문예도 활기를 띠는 등 조선 왕조의 중흥기였습니다. 한편으로 이인좌의 반란이 일어나고, 왕세자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하는 등, 정치적 격랑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영조실록은 영조대의 사실史實은 물론이고 조선 후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근본적인 자료입니다. 1920년대 이후 조선 역대 왕태조∼철종의 실록이 여러 차례 영인되었는데, 영조실록도 다른 왕의 실록과 함께 영인본이 간행되었습니다.
본서는 독자들이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독자 여러분 자세히 보면 제대로 보입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2023년 5월 에디터 이남철
- 영조 이금의 생애 -
영조는 1694년(숙종 20년) 9월 13일에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종에게는 둘째 아들이고, 경종에게는 이복동생이다. 6세에 연잉군으로 봉해지고, 경종 즉위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부왕父王 숙종은 1717년(숙종 43년 )7월 19일 노론의 이이명과 독대하여정유독대 노론과 모종의 정치적 결탁을 단행했다. 숙종은 세자 교체를 염두에 두고 노론에게 연잉군과 또 다른 아들인 명빈 박씨 소생의 연령군을 부탁했다. 숙종은 사실 연잉군보다는 연령군을 더욱 총애했다. 그러나 연령군이 숙종이 죽기 직전에 먼저 죽으면서 노론은 연잉군을 숙종의 후계로 삼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숙종이 죽을 때까지 세자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리청정을 하던 경종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경종의 즉위와 함께 노론의 연잉군 옹립 계획도 구체화되었다.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경종을 압박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후사가 없었던 경종은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허락했다.
경종께서 뭇 신하에게 명해 합문閤門 밖에 물러가 기다리게 했다가 조금 뒤에 다시 불러들여 자성의 수찰手札을 보이셨는데, 거기에 “효종대왕의 혈맥이며 선대왕의 골육으로는 주상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하셨으므로, 신하들이 다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 영조실록, 영조대왕 행장
연잉군의 세제 책봉에 성공한 노론은 더 나아가 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경종과 소론의 반격으로 노론은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에 두 번의 옥사신임옥사를 치러야 했다. 이것은 노론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세제인 연잉군에게도 위기였다. 소론 강경파들은 연잉군에게도 불충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경종의 배려로 연잉군은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1724년(경종 4년) 8월 25일,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세제인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21대 영조다. 그런데 경종의 죽음과 관련해 독살설이 유포되면서 영조는 초반부터 정치적 부담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었다. 독살설은 다름 아닌 영조를 겨냥하고 있었다. 영조는 이러한 혐의를 벗고 이후 계속된 신임옥사와 관련한 충역시비懷尼是非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당쟁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했다. 그것이 바로 영조가 펼친 탕평책의 핵심이었다.
영조는 2남 7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비인 서종제의 딸 정성왕후에게서는 후사가 없었다. 영조는 정성왕후가 1757년(영조 33년)에 죽자 2년 뒤인 1759년(영조 35년)에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았다. 당시 영조의 나이 66세였고, 정순왕후는 불과 15세였으나 그 사이에서도 후사를 보지 못했다.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진종으로 추존를 비롯해 1남 1녀를,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장조로 추존를 비롯해 1남 3녀를 낳았다.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지만 효장세자에게 입적되어 있었다.
영조가 노론의 택군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당장 노론의 세상이 열린 것은 아니었다. 이광좌, 유봉휘, 조태억 등 소론 대신을 삼정승의 자리에 앉히고, 한편으로는 신임옥사 때 유배되었던 노론의 영수인 민진원을 풀어주었다. 노론의 왕이라는 인식이 부담스러웠던 영조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다.
당쟁의 폐단을 없애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어느 한쪽이 죄가 있으면 다른 한쪽도 치죄해 공평성을 유지한다는 탕평의 원칙을 고수했다. 노론 측 젊은 유생 이의연이 신임옥사를 주도했던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목호룡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자 그들을 참형에 처하는 동시에 이의연 역시 장살했다. 영조는 소론 온건파를 기용해 소론의 반감을 적당히 무마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가장 적대적인 소론 강경파를 효과적으로 제거했다. 그러면서 탕평의 논리를 내세워 노론에게도 희생을 요구함으로써 노론에 의해 만들어진 군주라는 혐의를 벗고자 노력했다.
영조의 조치에 대해 소론은 크게 반발했고, 노론 역시 불만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영조의 복안은 노론 정권을 수립하는 데 있었고, 그러한 사실은 1725년(영조 1년)에 접어들면서 확실해졌다. 영조는 윤봉조가 소론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계기로 요직에 있던 소론 대신들을 파직시키고, 정호, 민진원, 이관명을 삼정승으로 하는 노론 정권을 출범시켰다. 그해 3월에는 을사처분을 통해 신임옥사를 무옥誣獄으로 규정하고 더불어 당시 사사되었던 노론 4대 신김창,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을 신원했다. 어제의 역적이 오늘의 충신이 되는 상황이었다.
노론은 소론을 역적으로 규정하며 이광좌, 유봉휘, 조태억 등의 소론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노론 중심의 탕평 정국을 구상했다 해도 영조는 소론에 대한 지나친 탄압과 축출을 원하지 않았다. 영조가 노론의 요구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급기야 준론노론 강경파 민진원은 이광좌를 치죄하든지 아니면 자신을 내치라는 극단적인 요구를 했다. 왕의 권위를 내세워 위협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해 보기도 했지만 준론의 강경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탕평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영조는 좌의정 민진원을 해임하고, 완론노론 온건파인 홍치중을 중용했다. 홍치중은 소론 인사와도 두루 잘 지냈기 때문에 탕평내각을 구성하기에 적임자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한동안 조정은 노소가 두루 기용되며 영조의 뜻대로 안정되는 듯했다. 준론의 견제와 공격으로 홍치중은 결국 실각하고 말았다.
1727년(영조 3년) 4월, 유배되었던 소론 유봉휘가 사망했다. 노론 준론은 소론에 대한 공세의 수위를 더욱 높였다. 영조는 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준론과 손을 잡고 소론을 몰아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뜻대로 소론을 등용해 탕평책을 이어 갈 것인가. 결국 영조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전격적으로 신임옥사를 무옥으로 규정하고 노론 4대신을 신원했던 을사처분을 백지화했다. 또한 을사처분 당시 파직되었던 소론 인사들의 관작을 회복하고 재등용함으로써 소론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정미환국을 단행했다.
재위 초기는 신임옥사를 무옥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역옥으로 볼 것이냐의 충역시비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졌다. 영조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자신이 신임옥사에 연루된 당사자였기 때문이었다. 충역시비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한 영조는 계속해서 정치적 부담을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1728년(영조 4년)에 무신란戊申亂, 일명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호남의 박필현, 호서의 이인좌, 영남의 정희량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이었다.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로 구성된 주동자들은 경종 독살설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영조는 불법으로 왕위를 차지한 역적에 불과했는데, 을사처분으로 신임옥사가 무옥 처분을 받은 것에 분개해 반란을 도모한 것이었다. 이들은 경종에 대한 충성을 다하다가 처단된 김일경과 목호룡의 가족들과 교류하며 무신당을 조직해 반란군의 규모를 키웠다.
반란 직전에 변수가 생겼다.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노론이 아닌 소론이 집권한 상태에서는 반란의 명분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반란 주동자 중에 한 명인 박필현이 태인현감으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반란군의 한 축이 약화되었다. 반란군 내부에서도 좀 더 사태를 관망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신중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논의 끝에 일단은 이인좌를 중심으로 지방에서 먼저 거병하고 수도에서 이에 동조하는 방식으로 거사를 치르기로 전략이 정해졌다.
1728년(영조 4년 )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반란이 시작되었다. 이인좌는 충청병사 등을 살해하고 “독살된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 탄坦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라는 내용의 격문을 사방에 붙였다. 반란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각처에서 반란에 가담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군중에는 경종의 위패를 모셔 경종 독살을 공공연히 표방했다. 3월 20일, 영남의 정희량 등이 예정된 거사일보다 늦게 안음 지역에서 거병했다. 이들은 곧바로 거창, 합천 지역까지 점령했다. 사기가 높아진 영남 지역 반란군은 이인좌의 반란군과 합세했다. 호남에서는 박필현이 뒤늦게 군대를 일으켰지만 동조하기로 했던 전라감사 정사효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반란군의 북상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에서는 도성의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반란군에게 내응할 만한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인사들을 미리 체포하는 등 대비를 철저히 했다. 결국 이인좌 등이 이끄는 반란군은 소론 온건파인 오명항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무신란은 소론 정권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쪽이나 진압한 쪽이나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기는 해도 다 같은 소론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론이 소론을 탄핵할 충분한 빌미였다.
영조도 이 일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특히 영조는 자신이 특별히 실정하지 않았는데도 반란이 일어난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발생한 데는 소론뿐만 아니라 노론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했다. 무신란은 영조의 탕평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했다. 영조는 소론도 노론도 아닌 탕평만이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탕평파의 중용으로 이어졌고, 그들이 새로운 집권 세력으로 부상했다.
탕평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조문명, 조현명, 송인명으로, 모두 무신란 당시 반란군 토벌에 공이 큰 소론계 인사들이다. 탕평파는 영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이때의 탕평은 노소 보합保合, 즉 노론과 소론의 공평한 등용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노론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소론 탕평파는 노론 탕평파인 홍치중의 분등설로 풀어나갔다. 분등설은 그동안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던 충역시비를 사안에 따라 처분을 달리하자는 의견이다. 이에 따라 신축년에 세자의 대리청정과 관련해서 일어난 옥사는 충으로, 임인년에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던 사건은 역으로 규정되었으며, 사사된 노론 4대신 중에서 이건명, 조태채는 신원하고 자손이 임인옥사에 연루된 김창집과 이이명은 신원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반충반역半忠半逆, 패자역손悖子逆孫의 논리가 적용된 1729년(영조 5년)의 기유처분己酉處分이다. 이것은 노론의 불만과 소론의 반발을 무마해 소론 탕평의 명분을 쌓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후 전개된 신임옥사에 따른 충역시비 정리는 노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영조는 노론 준론의 영수인 유척기를 입조시킨 데 이어, 임인옥사 당시 처벌된 서덕수를 신원했다. 서덕수는 영조의 처조카이면서 목호룡의 고변 당시 3수三手, 즉 경종을 세 가지 방법으로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서덕수의 신원은 영조 자신의 혐의를 벗고자 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1739년(영조 15년)에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에 대한 불경을 이유로 조현명, 송인명 등 탕평파를 대거 파직시켰다. 파직된 탕평파를 대신해 기용된 노론들은 자신들의 신원에만 급급할 뿐 정작 영조의 혐의를 벗기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영조는 노론 준론을 일시에 퇴진시키고 다시 한번 탕평파를 기용했다. 하지만 1740년(영조 16년)에 영조는 임인옥사를 무옥이라 천명하고 당시 역적으로 몰려 처벌되었던 사람들의 신원을 강구하는 경신처분을 내렸다. 결국 영조가 즉위하고 15년 만에 충역시비는 처음에 내렸던 을사처분대로 정리가 되었다. 이는 소론 탕평의 종언과 노론 탕평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영조는 신유대훈辛酉大訓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세웠다. 앞선 경신처분을 대훈으로 정리해 발표한 것이다. 이어 이러한 사실을 고묘告廟, 종묘에 고함하고, 영조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어 반드시 호대互對로 할 필요는 없으니, 만일 등용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비록 한 편의 사람을 백 번 들어 쓴다 하더라도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오늘의 처분이 있은 뒤에는 등용하고 버리기를 공정하게 하고 사사롭게 하는 것이 진실로 전조銓曹, 이조와 병조에 있으니, 그것을 각각 힘쓰도록 하라.” - 영조실록 권 54, 영조 17년 10월 1일
이는 앞으로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던 소론 탕평은 끝나고 노론 준론 중심의 탕평이 펼쳐질 것임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1755년(영조 31년)에 일어난 나주 괘서 사건을 계기로 이를 주도한 윤지尹志를 비롯해 수많은 소론 인사가 처벌됨으로써 소론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를 을해옥사라 한다. 또한 영조는 그동안의 충역시비와 관련한 일련의 과정이 모두 소론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자신이 이를 엄히 다스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러한 영조의 태도는 노론의 정권 독점을 가속화했고,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잉태했다.
결국 영조가 추구한 탕평은 노론을 중심으로 정국의 안정을 꾀한 후에 노론과 소론을 골고루 기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신유대훈과 을해옥사 이후 노론의 정치적 우위가 더욱 심해지면서 탕평의 기본 취지는 퇴색되었다.
그런 가운데 노론 척신 세력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시 척신 계열과 비척신 계열로 나뉘어 반목했다. 이러한 분열의 중심에는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있었다. 특히 홍봉한은 점점 심각해지는 세자의 비행이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입막음용 뇌물을 주고받는 등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이러한 홍봉한에 대해서 공세를 취한 세력을 공홍파功洪派라고 하고, 옹호하는 입장에 있던 세력을 부홍파扶洪派라고 불렀다.
공홍파와 부홍파의 세력 다툼이 한창일 때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는 동안 공홍파든 부홍파든 나서서 말리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유교적 대의명분이나 의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당파적 이해관계만이 있을 뿐이었다.
왜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여야만 했을까? 사도세자는 영빈 이씨 소생으로 정빈 이씨 소생의 효장세자가 10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2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되었다. 평소 성격이 조급하고 민첩했던 영조에 비해 세자는 말수가 적고 행동이 느린 편이었다. 영조는 그런 세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조는 천인 출신의 어머니 그리고 경종 독살설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왕위에 오른 탓에 오로지 자신의 혐의를 벗고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데만 골몰한 외골수였다.
스스로 근신의 태도를 잃지 않았던 영조는 세자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세자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조의 인정을 받기는 힘들었다. 이에 세자는 성년이 되면서 부왕에 대한 반발심으로 점차 엇나가기 시작했고, 비행을 일삼게 되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부터였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정치적 견해 차이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조는 노론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갔고 세자는 거기에 불만이 많았다. 노론 역시 자신들이 하는 일에 반대하고 나서는 세자를 정적으로 간주하고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들은 세자의 비행을 알고도 이를 왕에게 알리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세자를 공격할 빌미로 삼기 위해서였다.
한편 영조와 노론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부 소론 인사가 나서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공홍파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형조에 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고변을 했다. 이 고변은 영의정인 홍봉한에게 먼저 올라갔다. 홍봉한은 고민 끝에 고변의 내용을 영조에게 알렸다. 더 이상 세자를 감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 진노했다. 고변을 한 나경언과 세자의 비행에 관련된 인사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영조는 마침내 세자를 폐위했다. 심지어 세자 앞에서 칼을 휘두르며 자결을 명령하기도 했다. 세자가 그 앞에서 죽으려 했으나 신하들이 만류했다. 세손정조은 울며 아비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선 영조는 기어이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굶어죽게 만들었다. 이것이 1762년(영조 38년)에 일어난 임오화변의 전말이다.
임오화변 이후 세자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던 홍봉한은 공홍파의 공세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영조의 비호로 홍봉한과 부홍파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조가 홍봉한을 비호한 것은 결국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에 대한 연대의식 때문이었다. 홍봉한의 혐의를 인정한다면 자신의 과오도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것은 영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재위 기간 내내 경종 독살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영조는 이제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는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다. 결국 영조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아들을 죽이게 된 셈이었다. 대권은 두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재위 기간 내내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집권 중반 이후에는 노론 쪽으로 기울어지긴 했지만 줄곧 탕평을 외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사림정치 붕괴의 서막이 된 서원 철폐와 청요직 혁파 등의 제도 개혁을 통해서 당쟁의 폐단을 줄이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탕평정치를 실시하기 위해 1741년(영조 17년)에 사림정치의 틀을 깨고 전제 군주로 돌변했다. 탕평책으로 소론의 입을 통해 경종 독살설에 대한 혐의를 벗은 영조는 전제 군주로서 대민 정책에 골몰했다. 영조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민 정책을 폈다. 군역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고, 압슬형, 난장형 폐지 등 가혹한 형벌을 금했다. 차별받은 서얼들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며, 첩의 자손에 대한 상속권도 인정해 주었다. 또한 성종 때 이래 폐지되었던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기도 했다.
영조는 매우 검소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벼슬아치들과 사대부 여인들의 사치 풍조를 개탄하며 이를 바로잡고자 스스로 먼저 검소한 태도를 보였다. 왕실에서 고급스러운 비단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본인의 옷과 이불도 모두 명주로 만들어 썼다. 또한 사치의 상징인 여인들의 가체를 금하고 대신 족두리를 쓰게 했으며, 때때로 금주령을 내렸다.
영조는 어제경세문답, 위장필람을 저술하고, 퇴도언행록, 여사서, 소학훈의,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록, 속병장도설, 누주통의, 해동악장, 여지도서, 동국문헌비고 등 수많은 서적을 간행해 조선 후기 문화의 중흥을 이끌었다.
영조는 1776년(영조 52년) 3월 5일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이때 나이 83세로 조선의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살았으며, 재위 기간도 무려 52년이나 되었다.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펼친 점, 애민주의에 바탕을 둔 올곧은 치정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 했다는 점,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해 근면한 생활을 한 점, 그리고 여러 가지 제도의 정비와 혁파로 조선 후기 사회 제도의 안정을 꾀한 점 등은 영조의 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론에게 무게중심이 쏠리면서 외척 세력을 키우고 미완의 탕평으로 끝난 점, 기득권층의 논리에 밀려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이룩하지 못한 점,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혈육을 희생시킨 점 등은 매우 아쉽다.
영조의 뒤를 이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묘호는 원래 영종英宗이었으나 후에 영조英祖로 고쳤다.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원릉이다.
2023년 5월 에디터 배용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