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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6091463
· 쪽수 : 139쪽
· 출판일 : 2015-07-17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해질녘/한줌의 방/골목 축구/지하상가를 지나며/사물함의 저녁/큰오색딱따구리 평전(評傳)/찰칵찰칵!/창이라는 門을 닦을 때/불타는 해변역/풍경의 속도/허공의 집/씨앗論/폐사지에서/꽃병과 불새/어떤 독거
제2부
먼 행성의 기도/별빛극장/강이라는 그 말/아이들이 지나간다/평상(平床)/무연고의 탄생/너무나 기록적인/우물의 눈물학/자미원에 간 적이 있다/병뚜껑/내 마음의 특급호텔/양지공원에서/바람의 책/재수 좋은 날/빛의 진원지
제3부
구덩이/굴뚝의 잠/황홀한 눈/낙천주의자들/꽃손/산지천 너머/물비늘/무인도/어느 생애의 작두/슬하/쪽배/도마를 꿈꾸다/바닥의 주소/다시, 섬/호미곶 물결傳
제4부
알작지/붉은발말똥게/물 위의 생가(生家)/할망바당/남방큰돌고래/원담에 대한 소고(小考)/해무에 대하여/푸른바다거북/다려도의 밤/聖스러운 순간에/수선화 슈퍼/바람 속으로/연정을 품다/무인등대 앞에서/파랑
해설|타자에로의 미메시스와 현현하는 삶의 이미지 / 이성혁(문학평론가)
저자소개
책속에서
무연고의 탄생
겨울비 쏟아지는 골목 귀퉁이에
그 사내는 하늘을 향해 반듯이 누워 있었다
슬픔도 닫혀버린, 그의 빈집은
오히려 영하의 날씨에도 문이 열려 있는 채
생(生)을 통과하지 못한 독촉 우편물들이
적나라한 이승의 행적을 따라가며 쌓여 있었지만
유일하게 연고를 알 수 있는 것은 지문뿐,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혈육은
왕래가 끊긴 무덤덤한 세월의 덕에
아무런 정도 남아 있지 않아 거둘 수 없었고
곧바로 화장터로 가는 길
한 그릇의 눈물비빔밥도 없이
막다른 길을 빠져나오는 동안
먹자골목의 간판이 하나씩 조등처럼 켜지는데
기웃거리는 묵념조차 없고
쓸쓸함을 감추려고 입술 깨물던 하늘이
그의 누런 뺨을 젖은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견고했던 동네로부터 진동하는 균열의 냄새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첫울음처럼 터져 나왔다.
지하상가를 지나며
엎드린 밤하늘에서 별을 만지다가
월경(越境)하듯 지하계단으로 빠져 들어가는 나를
또 다른 내가 붙잡지 못한다
폐장이 가까워졌지만 동선을 꿰뚫고 있는 발끝에
우연을 가장한 전생이 있을 법하다
깊이 잠들지 못하는 쇼윈도에서
시린 불빛 몇 점 나지막이 비쳐 나오고
원죄를 깨닫게 해주던 마네킹이 등 뒤에 따라붙는다
수선집 앞에서 해진 마음을 박음질하자
어린애가 신어 보았던 꽃신이 아장아장 걸어 나오고
절정에 다다른 가난이 눈물의 세일을 하는 동안
나는 어딘가에 있을 땅심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충동의 몸짓에 불과하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나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지상의 위험수위를 가늠할 수조차 없어
머리끝으로 신열이 번져 가는데
하루를 끌고 왔던 검은 새 한 마리
걸려 있는 블라우스에서 몰래 실밥을 쪼아 먹다가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입구를 향해
잽싸게 파드닥거리며 날아가 버린다
나는 떨어진 깃털, 지폐 한 장을 손에 움켜쥔 채
끝 모를 기다림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길에서
지상의 밤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이곳은 끝내 잠들지 못하는 미궁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