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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사진/그림 에세이
· ISBN : 9791186561065
· 쪽수 : 360쪽
· 출판일 : 2015-07-10
책 소개
목차
첫번째 토이…… 어린 시절
미국 장난감의 역사
epilogue #1
두번째 토이…… 에든버러
epilogue #2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네 살 터울인 언니는 그림자 인형극을 곧잘 해주었다.
베란다 창에 갱지를 붙이고는 해를 등지고
종이 뒤에 납작 엎드려 직접 만든 종이 인형 두 개를 들고
그림자 연극을 시작했다.
고작 두세 명의 등장인물로 열 살 아이가 하는 인형극이
뭐 그리 재밌었겠냐마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던
그 옛날의 어린 나에게 언니의 인형극은 최고의 공연이었고
언니는 세상 누구보다 훌륭한 어른이었다.
온 세상이 장난감이었던 그런 때였다.
**
낭만이 있던 자리를 기술이 가득 채운 뒤,
사람들은 혼자이길 원하면서도
오롯이 혼자이긴 힘들어하는
슬프고도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시장에서 사온 길쭉한
빨간 쿠션을 어른이 되어서도 매일 밤 끌어안고 잤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 침대 머리맡에는 늘 인형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여섯 살 처음으로 이름 붙인
말 인형 ‘비비’, 오토바이 뒷자리에 나를 태워 동네를 달리곤 했던
외삼촌이 사준 큰 곰 인형 ‘체키’, 꼭 안아주면 기괴한 울음을
내던 코끼리 ‘아나주’, 내 용돈으로 처음 산 물개 ‘쥉크’…….
내 가장 친한 친구였던 언니가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가버리고
난 후, 인형이 생기면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주며 친구 삼던
시간이 있었다. 가끔 때가 꼬질꼬질한 그 인형들이
가슴 저리게 그리운 순간들이 온다.
어른이 되니 무엇이든 추억할 어린 시절이 생겨서 참 좋다.
**
학교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파인아트 전공실은
창의력 있는 학생들의 예술혼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디자인과의 대학원생들에게는 수준 높은 스튜디오가
제공되었다. 외부에서 초빙되는 튜터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이었다.
교수들 역시 모두 영국에서 활발하게 활동중인 작가들이었지만
학교 안에서만큼은 철저하게 학생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일
뿐이었다. 학교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학생을 위해
존재했다. 대학원생에게는 그 학교의 모든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고 덕분에 나는 소원이었던
판화를 배울 수 있었다. 실크스크린, 석판화, 에칭 등을
배웠는데, 큰 앞치마를 두르고 몸에 약품 냄새를 가득 묻히며
작업하는 거대한 스케일에 완전히 매료되어 파인아트를
전공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트북 프로젝트에 참가했다가
학교 대표로 뽑혀 런던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했을 땐
북 아티스트가 될까 고민하기도 했다. 작업하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는 이야기다. 배우는 모든 것이 다 내 것만 같았다.
**
혼자 벼룩시장에 갔다가 처음으로
산 것은 50펜스짜리 낡은 펠트 인형이었다. 재질로 봐서는
골동품도 아니고 바느질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누런 펠트 두 장을 앞뒤로 붙여 단추 두 개를 달아놓고는
나일론 리본을 묶었을 뿐인데 어쩐지 매력적이었다.
‘어린 왕자’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부적처럼 책상 앞에
세워두었다. 우울하게 생긴 이 인형을 볼 때마다
어쩐지 나를 보는 듯한 생각이 들어 괜스레 짠해지곤 했다.
**
암스테르담 어느 골목을 걷다가 작은 돗자리에
물건을 진열해둔 노점 상인을 보았다.
책 몇 권, 잔과 소서saucer, 은빛 커트러리cutlery와 안경 등의
생활용품이 듬성듬성 놓인 틈에 할머니 인형 하나가 있었다.
스타킹으로 만들어진 인상 좋은 얼굴,
몇 번의 수선을 거쳤는지 빛바랜 솜 위에 덧대어진 하얀 솜 머리칼,
정교하게 움직이는 다섯 개의 손가락과 섬세하게 지어진 속옷,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나막신까지.
어쩐 일인지 닮지도 않은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나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
파리 파르망띠에르 에비뉴 114번지에는
눈에 확 띄는 노란색 가게가 있다.
여든이 넘은 의사 앙리 로네Henri Launay가
40년이 넘게 의술을 펼치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형 병원이다.
앙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아갔을 땐
안타깝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각국에서 온 감사 편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창 너머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인형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이곳을 찾아왔을지 알 것만 같았다.
앙리가 복원하는 건 그들의 인형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려질 인형을 복원하며 그 추억도 함께 되살리는 거겠지.
그러고 보면
추억처럼
아름다운 게 없다.
**
한국으로 돌아가기 한 달 전만 해도 정말 몰랐었다.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슬플 줄은.
유학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외국 생활을 동경했었다.
그렇게 바보 같았다.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그저 그림책 한 권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 책 안에 있는 내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떠나기로 한 것인데.
나도 모르게 등장인물이 되었던 걸까?
책장을 덮을 시간이 되니 알 수 있었다.
다시 찾아오지 않을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를.
에든버러를 떠나는 전날, 짐이 없는 빈방에서
여행 가방을 안고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소리를 흡수할 가구가 없어서
내 울음이 온 방 안을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