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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6602430
· 쪽수 : 148쪽
· 출판일 : 2018-11-22
책 소개
목차
3개월 일시불 선결제 해주세요
1번 발, 2번 발이라는 게 있는데…
여기요! 미디엄, 미디엄 사이즈 갖다주세요!
좀 찢어드릴까요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셰네로 돌다가 통베 파드부레 다음에 앙드오르로 두 바퀴 돌고
신발 가운데를 말이죠, (흡!)
소란스러운 고요함
고백하자면 나는 힘 빼기를 두려워했다
오오 터닝신이 강림하셨다!
어떤 동작이든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나는 내 몸을 다시 빚는 중이다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015년 1월 어느 토요일, 잔뜩 긴장한 채 서울 동교동의 한 성인 발레 전문학원에 들어섰다. 저 등록하러 왔습니다. 친절한 부원장이 물었다. 발레는 처음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몸에 안 맞을 수도 있는데 기초반 한 달만 들어보고 계속할지는 그때 결정하시죠. 아닙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신용카드를 내밀며 3개월 일시불 선결제 해주세요, 외쳤다. 개강은 2월 초니까 그때 오세요. 영수증을 손에 쥐고 문을 나서니 햇살이 따사로웠다. 수업 시작 전까지 살을 좀 뺄 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당시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복하게 야식을 즐기다가 고3 때의 몸무게를 회복한 상태였다. 운동을 꾸준하게 했으니 기초대사량이 높을 것이다, 많이 먹어도 잘 찌지 않을 것이다, 방심하다가 의문의 벌크업에 성공해버렸던 것이다. _「3개월 일시불 선결제 해주세요」
운동이란 걸 처음 시작한 건 서른이 넘어서였다. 여러 운동을 골고루 방황했지만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요가는 급한 내 성격에는 너무 조용해서 지루했다. 자전거는 한강 변에서 옷이 찢길 정도로 무릎에 심한 찰과상을 입은 뒤 속도 내기가 겁났다. 수영은 하필 새벽 수업이라 알 빠진 옥수수처럼 듬성듬성 나가다 보니 흥미를 잃었다. 피트니스는 잘못된 운동 방식 때문에 허벅지가 커져서 그만뒀다. 엉덩이와 허벅지 살을 빼는 데 좋다고 들어서 20킬로짜리 바벨을 등에 지고 각종 스쿼트를 무작정 열심히 했던 것이다. 젠장, 여자는 근력 운동을 해도 근육이 안 커진다고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생생한 반증이 여기에 있으므로 반드시 ‘대체로’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그때 생긴 바위 같은 큰 근육은 없어지지도 않는다. 하체 비만이 근육 돼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_「3개월 일시불 선결제 해주세요」
플리에는 스스로를 높이겠다는 마음으로는 스스로 높아지지 않는 삶과 참 많이 닮았구나, 생각할 때가 있다. 내려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올라갈 수 있는 힘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바워크의 플리에를 하면서 가끔 불전에서 108배를 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나 자신을 최대한 낮춤으로써 사실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닮아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에 ‘플리에’의 순간이 있는 게 아닐까. 낮아지고, 떨어지고, 주저앉는 순간들 말이다. 원하던 일을 얻지 못했을 때,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어그러졌을 때, 사랑이 어긋났을 때, 누군가에게 거절당했을 때, 그건 넘어지는 게 아니다. 그저 각자의 ‘플리에’를 하는 거다. 높이 뛰어오르는 순간이 있으려면 플리에를 꼭 거쳐야 하고, 내려와야 할 순간에도 플리에는 꼭 필요한 거니까. 그래서 나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날에는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곤 한다. 플리에 같은 그 시기를 잘 지난다면, 인생의 속근육도 자라는 것이겠지._「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