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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6644959
· 쪽수 : 228쪽
· 출판일 : 2019-10-25
책 소개
목차
달로 가는 사다리 · 7
그리하여 숨 · 47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 81
다정큼나무 꽃이 피면 · 121
봄에 홀리다 · 159
해설 _ 일상 속 작은 희망을 찾아서 · 195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때쯤 소년 이현수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사다리 아래서 뭔가를 만들던 남자애들 중 한 아이였다. 그들이 만드는 것은 모형 거북선이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을 만한 크기였다. 인물사전의 별책부록이라고 했다. 아이들 중 누군가는 내가 사다리를 오르내릴 때마다 휘익휘익! 휘파람을 불어댔다. 나는 사다리를 오르는 일에 처음처럼 조바심치지 않았다. 판탈롱을 입었으면 편했을 텐데 무슨 심사였는지 나는 굳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사다리를 오르내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다리를 올랐지만 소년 이현수는 휘파람 부는 아이를 번번이 저지하고 야단쳤다. 그가 작업반장쯤 되는 것 같았다. “에이, 그러지 말라니까. 우리가 저질로 보이잖아!” 그가 말리면 누군가가 말했다. “야, 우리가 좀 밑에 있긴 하잖냐! 쟨 저렇게 높이 있고.” 그 말에 소년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밑에 있니? 우리가 평생 모형 거북선이나 만드냐구.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만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뒤 나는 처음으로 소년을 자세히 바라다봤다. 키가 작고 얼굴도 작았다. 몸은 말랐지만 허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눈빛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눈에 확 뜨일 만큼 형형했다.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만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그 말은 소년이 자신에게 한 말이었겠지만, 사실은 내게 더 큰 응원의 메시지가 되어 꽂혔다.(「달로 가는 사다리」)
욕조의 물이 식었다. 물을 한 컵 마시고 뜨거운 물을 받는다. 욕실 안이 더운 김으로 가득 찬다. 물속에 몸을 누인다. 가쁘게 토해내는 내 숨소리뿐, 욕실은 너무도 적요하다. 아파트 주민들이 나만 이곳에 가둬놓고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처럼 고요하다. 이 문은 언제 무엇이 의해 열리게 될까.(「그리하여 숨」)
형제가 많으니 성격에도 배움에도 차이가 있고, 사는 수준의 높낮이도 달랐다. 당연히 크고 작은 갈등과 질시가 있었다. (…) 한데 막내가 오십을 훌쩍 넘기자 모든 경계가 허물어졌다. 너무 분명해서 도저히 허물 수 없을 것 같던 구획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평준화되었다. 배움도, 살림살이 형편도, 성격도, 인물까지도. 젊어서는 아버지를 빼닮았던 막내와 남동생까지도 희한할 만큼 엄마 얼굴이 되어 버렸다.(「차표 한 장 손에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