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신앙생활일반
· ISBN : 9791186762059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18-08-14
책 소개
목차
추천글
50년 함축하여 고백합니다
시호명명 청호무성(서임중 원로목사, 포항중앙교회)
감림산기도원 50주년입니다(강문호 목사, 갈보리교회)
주님을 향한 첫사랑에서 나온 헌신과 열정 (정인수 목사, 전 CCC 국제본부 부총재 )
프롤로그
: 제1부 :
배움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1. 열네 살에 주일학교 반사가 되다
2. 여자는 공부할 필요 없다
3. 날마다 교회로 달려가다
4. 드디어 열린 배움의 길
5. 졸업식에 오신 할아버지
6. 40일간 계속한 노방전도
7. 엄격한 수도 생활
8. 첫 설교의 감격
: 제2부 :
황무지를 개척하라
1. 주여 순종하겠나이다
2. 산중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3. 1만 원에 사들인 기도원 부지
4. 마사 흙이 진흙으로 변하다
5. 돌과 진흙으로 지은 기도의 집
6. 늑대가 밤새워 지켜주다
7. 구치소에서 신나게 전도하다
8. 동네 어른들과 떠난 선교여행
9. 11년 만에 만난 정윤오 전도사
10. 떡국 끓여 장병선교에 나서다
: 제3부 :
기적의 동산 감림산기도원
1. 과분한 평가
2. 산 중턱의 하얀 건물들
3. 대성전 건축 허가가 나다
4. 구국 성회와 연중무휴예배
5. 눈물로 시작한 사모 세미나
6. 기도원 최대의 위기
7. 다음 세대 위한 오병이어 캠프 .
8. 영을 살리는 트레스 디아스
9. 미국으로 TD를 가다
10. 레인보우 TD와 하얀사랑선교회
11. 발로 뛰는 하얀사랑선교회
: 제4부 :
땅끝까지 달려가리
1. 일본유학을 떠나다
2. 첫 선교지 방글라데시
3. 인도네시아에서 개최한 교역자세미나
4. 필리핀에서 열리는 5개의 TD
5. 중국에 개설한 가정신학교
6. 인도에서 받은 문화충격
7. 콧대 높은 이스라엘 유대인
8. 유서 써놓고 타지키스탄으로
9.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
10.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들
11. 스리랑카를 덮친 쓰나미
12. 마다가스카르의 합동결혼식
13. 지진으로 갈라진 아이티
14. 선교는 계속된다
: 제5부 :
감림산기도원을 말한다
영적 충전의 장소 감림산기도원(김기원 원로목사, 서울장위제일교회)
엄청난 기도의 종합복합센터(김문훈 목사, 포도원교회)
고향과 같은 기도원(김신욱, 국가대표축구선수)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김제돈 목사, 큰사랑교회)
오, 그윽한 난꽃 향기여! (김찬기 목사, 대전방주장로교회)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친 복음 덩어리(백동조 목사, 목포사랑의교회)
그녀의 생애를 아름답게 쓰신 주님(송길원 목사, 가족생태학자)
다음 세대와 세계 선교를 향한 놀라운 헌신(안민 총장, 고신대학교)
“향기가 발하기까지!”(이경수 선교사, 필리핀 레인보우 TD)
에스더 같고 드보라 같은 원장님(이성태 목사, 울산서현교회)
내 인생의 멘토이신 원장님 (최요한 목사, 남서울비전교회)
기도의 불, 성령의 불(피종진 목사, 남서울중앙교회)
올바른 영성의 길로 인도하는 불기둥(김기현 장로, 전 울산광역시장)
원장님의 영성에 깊은 경의를(김경수 지사, 경상남도)
눈물의 기도처 감림산(안양호, 전. 행정안전부2차관)
오늘도 그리운 감림산이 있다(김정민 단장, 청년애국기도단 푸른횃불)
저자소개
책속에서
1. 열네 살에 주일학교 반사가 되다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간 것은 10세 때의 일이다. 도재라는 친구가 어디 갔다 오더니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라고 노래하면서 나에게도 가르쳐주었다. “노래 부른 다음에 손 모으고 눈 감아야 해”라며 눈감는 시늉을 하는 도재에게 나도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열 살 때 방앗간 옆에 있는 교회에 다니며 찬송가도 부르고 기도도 했다.
내가 정식으로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열세 살 때의 일이다. 내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탑리에 있는 들말교회에 소년면려회가 생겨 중학교 다니는 내내 열심히 출석했다.
우리 집은 전형적인 유교적 분위기였다. 집안의 최고 어른인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한 번 하면 온 집안 식구들이 초긴장할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예절 교육을 철저히 받아 문도 소리 나지 않게 닫고 하루에 몇 번이든 동네 어른께 꼬박꼬박 인사를 드렸다. 그런 나를 보고 어른들은 “옥란이는 열 번을 만나면 열 번을 인사한다”며 칭찬하셨다. 나는 매사에 불평하지 않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며 어른들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이였다.
집집마다 형제가 많을 때였는데 나는 남동생 한 명뿐인 데다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엄격한 할아버지가 어린 나를 업고 다닐 정도로 사랑해주셨다. 할아버지의 사랑에도 아버지가 보고 싶어 어머니에게 “나는 왜 아버지가 없어?”라고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느이 아버지는 먼 나라에 가셨는데 이다음에 좋은 선물 많이 사서 오실 거야”라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안 계셔도 슬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밖에서 큼큼 소리가 나면 아버지가 오시나 하고 내다봤다가 다른 사람이 오면 실망하곤 했다.
해방되던 해 동네 언니가 달려와서 나에게 말했다.
“야, 너네 아버지는 죽어서 돌아왔대. 우리 아버지는 살아서 돌아왔어.”
그 말뜻을 잘 모르고 우리 아버지는 선물을 사서 오실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아저씨가 하얀 상자를 메고 들어오자 곧이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셨다. 하얀 상자 안에 아버지가 담긴 줄 몰랐으면서도 나는 어머니와 함께 뒹굴면서 울었다. 내가 어찌나 서럽게 울었던지 동네 사람들도 “불쌍해서 어떡하나, 이 어린 걸 어떡하나” 하면서 함께 울었다. 겨우 다섯 살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달았다.
어머니는 스물세 살에 두 아이를 둔 과부가 되셨다. 어머니가 스무 살 때 아버지가 남양군도에 징용으로 끌려가셨으니 두 분의 삶이 참 애달프다. 미국의 폭격에 다쳤다가 나중에 영양실조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화장하여 해방 후에 모셔 온 것이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법 잘사는 축에 들었다. 우리 땅이 많아 할아버지는 늘 “나는 내 땅 밟고 산다”고 말씀하셨다. 두 남매를 키우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한 어머니는 권위적인 시아버지 때문에 자주 힘들어하셨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고생하며 설움 받는 걸 본 나는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러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아버지 없이 우리를 키우는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것이 나의 꿈이자 비전이고 희망이었다.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교회도 열심히 다녔다. 들말교회 소년면려회의 부회장을 맡아 결석하는 아이들을 일일이 방문했다. 새탐말에 살았던 나는 큰말, 우탁골, 강담말, 용소매기, 까치말, 돌모로 마을을 돌며 아이들에게 교회 나오라고 열심히 독려했다.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어른들이 두런두런 얘기하고 있을 때 나는 친구들을 찾아서 전도하느라 바빴다. 열심히 소년면려회를 부흥시키자 교회에서는 열네 살인 나를 주일학교 유치부 반사로 임명했다.
청주여중 다닐 때는 반장을 맡았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 가는 아이들이 많지 않을 때라 감사한 마음에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