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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7036296
· 쪽수 : 167쪽
· 출판일 : 2017-11-20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5
1_기억의 건축술 11
2_지하에서 12
3_상형문자 14
4_우는 어미 16
5_양가죽 여자 18
6_시든 꽃 미음 21
7_바다의 숲 22
8_갈릴레오, 코기토 24
9_길가메시 27
10_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31
11_존재와 무 34
12_세이렌, 스핑크스 37
13_곰 사냥꾼 41
14_이데아, 빛 44
15_히포의 사제 47
16_탁발 토마스 49
17_무소유 52
18_토굴에서 54
19_독학자 56
20_영원회귀 60
21_별들의 순수이성 64
22_정신 현상학 67
23_마음의 폴리스 71
24_산탄드레아의 실업자 74
25_로베스피에르, 당통 77
26_이오시프 주가시빌리 81
27_아돌프 지크프리트 84
28_갈대꽃 머리 88
29_숲의 사제 90
30_헛간의 비트겐슈타인 94
31_호텔 노마드 98
32_몰래 쓴 편지 101
33_압생트 104
34_런던의 원숭이 106
35_게걸스러운 펜 108
36_의지와 몽상의 오선지 111
37_풍경 114
38_표도르 미하일로비치 피티아 116
39_요나 도서관 118
40_모가지 120
41_나쁜 피 122
42_늦은 선물 125
43_뱀 몰이 128
44_황홀한 밤 133
45_그림자극 136
46_기도 139
47_베단타 나무 141
48_텅 빈 얼 143
49_비슈누 145
50_쑥부쟁이 꽃 148
해설ㅣ 신형철 151
저자소개
책속에서
<3_상형문자>
무너진 집, 돌담 옆에 주둥이를 잃어버린 항아리
물기 없는 흙바닥의 아가미처럼 헐떡거리는 아가리
병조각 널린 길에서 발가벗고 뒹구는 몸뚱이
벌레 먹은 세월이 엉겨 썩어 들어갈 때
책의 문을 열면 굴뚝새 한 마리 푸드덕 날아갔다
책 속으로 난 길은 하구의 강줄기같이 흩어지고
숲은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 잎사귀를 뚫고 햇살 몇 가닥 들어와
큰 나무뿌리의 이끼에 맺힌 빗물의 잠을 깨웠다
이 숲 어디엔가 손길 닿지 않은 유적 묻혀 있지 않을까
숲길 저 안쪽 샘물 옆에서 아니면 바위 그늘에서
숲을 지키는 정령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숲의 고래가 헤엄쳐 흘러 어디로 가는지
숲이 숨을 쉴 때 토해내는 안개의 양이 얼마인지
새벽이 숲을 깨울 때 무슨 밀어를 속삭이는지
숲을 지키는 사람을 만나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첫 열매를 떨어뜨린 새는 어디에서 왔는지
왜 열매는 흙에 뿌리를 내리고 손바닥을
꺼내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는지
도대체 뿌리는 어디까지 파고들어야 마음을 놓는지
숲에서 버섯 따는 사람을 만나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책 속으로 들어가 책과 책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멋대로 난 풀잎의 혓바닥이 종아리를 스치고
사금파리들이 발가락에서 피를 핥았다
손전등을 들고 더듬어보는 숲의 상형문자
입 꼭 다문 문자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25_로베스피에르, 당통>
고양이를 닮은 남자는 성량 큰 사람들 뒤에서 침묵을 지켰다
세상이 뒤집히자 정육점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이 감옥으로 몰려갔다
머리통을 잘라내 창에 꽂고 도시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물정 모르는 폭군이 왕궁 밖으로 도망가다 붙잡혔다
왕궁의 안주인은 버르장머리 없는 말을 했다
꼿꼿이 서 있다 왕을 따라 목이 잘렸다
폭동이 폭동을 몰고 왔다
인플레이션이 먹을 것들을 띄워 올렸다
군중은 손을 뻗쳤으나 하늘로 솟는 빵을 잡지 못했다
굶주림의 시궁쥐가 하수구에서 튀어나와 도시의 골목을 점령했다
나라 밖 군대가 국경을 에워싸고 군가를 불렀다
고양이를 닮은 남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찬양했다
도살용 칼을 든 여자들을 덕 있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옷소매가 닳아 해진 덕들이 모여들어
고양이를 닮은 남자에게 함성을 질렀다
남자는 책상 위에 책 한 권을 놓고 읽었다
하숙집 2층 방 베갯머리에서도 읽고
개를 끌고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아서도 읽었다
낡은 질서가 무너졌으니 신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계약이 놓여야 한다고
책을 읽은 남자는 엄숙하게 말했다
누런 머리털을 창백한 가발로 가리고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자라는 덕의 힘을 받들었다
새로 지은 집을 따뜻하게 데우려면
탐욕, 사치, 불의를 쓸어 담아
덕의 아궁이에 처넣어야 한단 말이야
창백한 고양이는 군중이 주는 덕의 기운을 먹고 자랐다
덕의 힘으로 사나워진 고양이는 죄로 물든 짐승들을 심판했다
널따란 책상에 앉아 아궁이로 보낼 배덕자를 찍어냈다
오늘의 적들이 오라를 지고 어제의 친구들이 사슬에 묶였다
멧돼지를 닮은 사내가 사나운 고양이를 닮은 친구에게 말했다
깨끗한 옷을 고집하다 보면 피를 뒤집어쓰게 돼
병균이 한 점도 없는 세상을 만들려다가
세상 자체를 박멸하게 된다니까
그때는 덕이라는 것도 남아나지 않게 되지
넌 순수한 것만 사랑하다가 눈빛이 변했어
폭군 없는 세상을 세우려다가 폭군이 되고 말았어
사나운 고양이를 닮은 남자는 멧돼지를 닮은 친구의 목을 잘랐다
덕을 믿지 않는 놈은 가난한 사람들의 적이야
적을 받아줄 만큼 새 나라는 넉넉하지 않아
허술한 지붕에서 기왓장이 떨어지듯
모가지들이 댕강댕강 잘려 떨어졌다
눈에 핏발이 선 고양이는 배신의 냄새가 나는 짐승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공포의 제단에 올렸다
배어든 냄새건 묻혀온 냄새건 냄새가 난다는 것이 죄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궁쥐와 들쥐들이 한밤중에 만났다
날이 밝자 들짐승과 날짐승 수백 마리가 고양이를 에워쌌다
발톱을 세운 고양이는 의사당 연단에 올라
발뒤꿈치를 들고 작은 목에 힘을 주었다
시궁쥐와 들쥐가 세상을 다시 하수구로 만들려 한다고 외쳤다
짐승들의 함성이 고양이의 하얗게 질린 목소리를 눌렀다
배고파 지친 군중은 덕의 변호인을 못 본 체했다
늘어진 고양이 목에서 피가 쏟아졌다
들쥐와 시궁쥐들이 피에 주둥이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