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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사 : 신약편

성서시대사 : 신약편

사토 미가쿠 (지은이), 김석중 (옮긴이)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2021-06-25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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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사 : 신약편

책 정보

· 제목 : 성서시대사 : 신약편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 역사
· ISBN : 9791187295587
· 쪽수 : 270쪽

책 소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도교라는 보편 종교가 걸음마 단계에서 홀로 서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목차

서문
초기 그리스도교사 약도

제1장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기원전 30년경~기원 후 30년경)
제1절 예수의 운동을 둘러싼 세계
제2절 예수

제2장 유대교 예수파의 활동(기원후 30년~45년경)
제1절 유대교 예수파를 둘러싼 세계
제2절 유대교 예수파

제3장 바울의 전도 활동과 티나 유대교의 멸망(45~70년경)
제1절 예수파의 활동을 둘러싼 세계
제2절 유대교 예수파의 전개

제4장 ‘그리스도교’의 성립(70~100년경)
제1절 ‘그리스도교’ 성립의 무대
제2절 ‘그리스도교’ 성립을 향한 고투

제5장 그리스도교의 전파, 박해, 내부 항쟁(100~200년경)
제1절 초기 그리스도교 주변의 세계
제2절 내외의 싸움을 안은 그리스도교

에필로그 기로에 서서

후기
신약성서사 연표
옮긴이의 말

저자소개

사토 미가쿠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본의 성서학자, 종교학자, 릿쿄대학 명예교수. 도쿄대학에서 서양고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스위스 베른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선불교에 조예가 깊은 불교학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성서시대사-신약편』을 비롯해 『비극과 복음 원시그리스도교의 비극적 요소』 『예수의 아버지는 언제 죽었는가』 『예수 연구사 고대에서 현대까지』 『지의 기초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도교』 등의 저서가 있고 이와나미역 성서의 『마르코·마태오 복음서』 『루카복음서·사도행전』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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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중 (옮긴이)    정보 더보기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한겨레신문>에서 판매와 광고 업무를 하다가 현재는 출판계에서 편집 일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마음을 들여다보면』, 『소년 시대』, 『미식 예찬』, 『교양 노트』, 『유모아 극장』, 『이야기가 있는 사랑수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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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리스도교’라고 불리기에 이른 종교가, 그 기반의 유대교로부터 자각적으로 스스로를 분리해서 홀로 서기 시작한 것은 -전체로서는 점진적인 프로세스였다고는 해도- 실은 기원 70년부터 1세기 종반 무렵이다. 그때까지는 유대교 내부의 개혁 운동의 하나였다고 간주하는 것이 사태에 가장 근접해 있다. 따라서 예수도 바울도 ‘그리스도교’라는 것은 몰랐던 것이다.

갈릴래아는 팔레스티나 북쪽의 땅이고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동서 약 40킬로미터, 남북 50킬로미터에 약간 못 미치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 땅은 이스라엘 왕국 분열 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733-732년의 시리아 에프라임 전쟁에서 북왕국이 아시리아에 패배해, 갈릴래아 등의 지방이 아시리아의 속주의 일부가 되고, 이에 더해 722/721년에 북왕국이 결국 멸망하자, 갈릴래아도 순수한 유대인의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결국에는 ‘요르단 강 건너편 외국인들의 지역’이라고 멸칭되기에 이르렀다. 즉 수세기에 걸쳐 이 땅은, 유대인 및 유대교도가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극히 이교적인 색채가 강한 땅이었다.

갈릴래아 나사렛 마을의 예수Iesus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기원 원년은 아니다. 기원 원년설은 6세기의 로마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가 스스로 믿었던 것에 따라 산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탄생은 <루카 복음서> 1장 5절에 따르면 헤로데의 생전, <마태오 복음서> 2장에 의하면 헤로데의 치세 말기, 즉 기원전 4년 무렵이 된다. 또한 마찬가지로 <마태오 복음서> 2장에는 ‘동방 박사들’이 빛나는 별의 인도를 따라 유대에 온 사정이 적혀 있다. 이것이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면, 최근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로는 기원전 6년경이 된다. 그러니까, 그해 5월의 어느 날 아침 해가 뜰 무렵, 동쪽 하늘에서 목성과 금성이 거의 하나로 접근해 이상한 광채를 뿜었을 것이라고 한다. 애초에 이 ‘별’의 등장이 진짜로 예수의 탄생과 같이 일어났다는 보증은 전혀 없다.

<마르코 복음서> 6장 3절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에게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네 명의 동생과, ‘누이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6명의 동생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가족 구성원이 아주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수는 그 시대의 수공업자 가족들처럼 나이 들어가는 아버지 요셉의 직업적 가르침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바르 미츠바’(직역하면 ‘계율의 아들’)라고 부른 13세의 성인 연령에 달했을 무렵에는 한 사람의 어엿한 목수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가 성인이 되고 얼마 안 있어 그의 아버지는 타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점이 있다. 또한 당시의 목수를 가장 밑바닥의 빈농과 비슷하게 놓는 설도 있지만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훗날의 전승 가운데는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당연히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정직하게 이해한다면 예수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시에 예수가 죄의 고백을 했다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예수 신격화의 길 위에 있었던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교도들로서는 매우 사정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예수가 요한을 찾아갔다는 것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 하거나(<마태오> 3:14-15), 혹은 세례를 받을 때 요한의 이름을 삭제하거나(<루카> 3:21), 끝내는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조차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게 되었다(<요한> 1:29 이하). 그러나 그러한 경향이 확인되면 될수록 예수가 죄의 고백을 하고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점점 더 명확해질 뿐이다.

이러한 대립이 대두되는 가운데 예수는 기원 30년 봄 유월절을 겨냥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유월절라고 하면 이집트 탈출의 국민적 구제를 기념하는 유대의 대축제다. 따라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가 결정적인 종말론적, 구원사적 사건이 아주 가까운 시간 안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배경의 근원, 예수는 아마도 신전 체제의 유지자들을 향해 최후의 ‘회개’를 요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비상한 결의가 배어나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모습을 복음서 기자 마르코는 다음과 같은 영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때 예수께서 앞장서서 가셨고 그것을 본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총독 필라투스는 예수의 재판 건을 맡아 직권 심리를 한 뒤 예수를 다른 두 명의 반란자와 함께 십자가형이라고 하는, 속주의 반(反)로마 반역자용으로 당시 가장 잔혹한 처형 방법으로 죽이기로 했다. 형장은 사람들의 본보기를 위해 순례자의 눈에 띄기 쉬운, 도시의 성벽 밖에 있는 ‘골고타’라고 불린 채석장 한 구석이 선택되었다. 유월절이 저녁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확실히 사람의 왕래도 빈번한 한낮의 처형이었다. 예수는 몇 시간 십자가에 매달려진 뒤, 오후 그다지 늦지 않은 시각에 의미 불명의 큰 소리를 지르고는 숨을 거두었다. 이때 예수의 동지들은 다들 어딘가로 도망친 채였다. 불과 두세 명의 여인들이 멀리서 전율할 만한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이 작은 사건이 그때부터 앞으로의 세계를 결정하는 일대 사건이 되리라고는 누구 한 사람 상상하지 못했다.

거의 확실한 것은, 이 몇몇 사람의 체험과 보고가 예수의 운명에 대한 활발한 해석 활동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해석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부활’ 표상의 기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자신들이 예수를 배신한 것에 대한 용서로서도 이해한 것이다. 이 체험과 그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것을 ‘예수 사건’이라고 부르고자 한다-은 절망 속에 있던 자들을 문자 그대로 다시 살아나게 한 것이었다.

이것을 보통은 바울로의 ‘회심’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꼭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바울로는 결코 그때까지와는 다른 신 혹은 종교로 갈아탄 것이 아니었다. 바울로에 있어서 ‘신’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신’의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구원의 행위-바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로 눈이 열린 것이다. 그 결과, 행동으로서는 그때까지 자신이 박해해왔던 사람들과 같은 편에 선다고 하는 역전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예수파의 여러 운동이, 얼마만큼 나사렛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을 계승한 것인가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예수 안에 있던 강렬한 사회적 참여에 대한 지향과 그것의 ?열광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생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에너지는, 원래의 강도대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계승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 신전 체제에 대한 격렬한 비판성은, 어느 정도 ‘헬레니스타이’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으로 상정되지만, 그 외에는 그다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예루살렘 원시교회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오히려 반대로 신전 존중의 태도로 돌아선 것 같다. 그리고 예수파 운동의 전반에 걸쳐, 많든 적든 예수 자체가 그들의 선교의 중심으로 이행해, ‘선교하는 자[예수]가 선교되는 자로 변했다’(R. 불트만)고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예수의 적극적인 초월화 프로세스의 개시이다.

마침 이 무렵부터 열심당원들의 반로마 무력 투쟁이 두드러지고, 유대 전역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열심당의 활동은, 요세푸스에 의하면, 직접적으로는 기원 6년의 퀴리니우스의 호구 조사에 반대해 봉기한 갈릴래아의 유다 및 바리사이파의 사독의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무렵부터 겨우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그들을 요세푸스가 말하듯이 단순한 ‘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모두가 이러한 ‘도적’의 불경하고 잔학한 죄에 대한 신의 벌이었다고 표현되는데, 이것은 로마에 대해 유대인 변호를 꾀한 요세푸스의 경향성에 의거한 것이다.

동시에 로마군의 예루살렘 전역에서의 약탈과 학살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잔혹한 에피소드 중 하나는, 어느 예언자의 말을 따라 신전 바깥뜰의 주랑 위로 피해 신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던 6천 명의 시민들이 밑에서 놓은 불에 전부 타 죽었다는 것이다. 최후까지 종말적인 신의 구원을 헛되이 기다렸던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아래쪽 마을이, 그리고 다음으로는 위쪽 마을이 파괴되어 불바다에 삼켜졌다. 이렇게 해서 70년 9월 26일 새벽, 성도 예루살렘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멸망했다.

그 직후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이방인 전도 여행에서의 바르나바와 바울로의 태도와 행동이 문제를 표면화시키는 데 일조했을지 모르지만, 예루살렘에 자리 잡은 유대인 예수파 사람들이 안티오키아로 와서 회심한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바라나바나 바울로의 안티오키아 교회를 중심으로 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선교 활동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 요구의 배경에는 앞서 적었듯이 팔레스티나에서 결국 표면화되기 시작한 반이방인, 반로마의 풍조에 대해 자신들의 운동을 보수적으로 옹호하려 했던 예루살렘에 있던 예수파 사람들의 사혹(思惑)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로는 주의 형제 야고보를 필두로 한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 신도의 대표자들과 함께 헌금을 내밀었을 것이다. 이거야말로 일찍이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의 약속의 이행이었고, 동시에 바울로가 목숨을 걸고 쌓아온 이방인 예수파 교회와 복음의 원천인 예루살렘 교회의 교제의 증거가 될 터였다. 그러나 그 헌금이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는 <사도행전>의 기자(루카)가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혹은 그 침묵이야말로 오히려 어떤 것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바울로의 헌금은 그 자신이 우려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랬다고 한다면, 바울로의 신념과 그의 활동은 여기에서 심각한 좌절을 맛본 셈이 된다.

‘마르코’라고 불렸던 아마도 이방인 출신의 작자는 기적 이야기 전승(군(群))이나 수난 이야기 전승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수 전승을 수집하고 편집해, 등장에서부터 그 비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예수의 모습과 그의 활동 및 그와 그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생생하게 묘사해내는 데 성공했다. 예수의 ‘복음’이 추상적인 ‘케뤼그마(kerygma, 선교용의 짧은 문장)’ 안에 매몰되지 않고, 드라마적 요소가 풍부한 생생한 이야기로서, 게다가 예수가 비극적인 몰락을 통해 처참하게 죽어간 이야기로서 현전하게 된 것이다. 작자는 이 이야기의 총체야말로 ‘복음의 근원begining of the gospel’이라는 주장을 기초로 해서 작품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처참한 패전이었다. 유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무수히 많은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을 뿐 아니라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유대인이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려갔다. 그 수가 너무도 많아서 유대인 노예 시장은 가격 하락을 초래해 노예 한 명의 가격이 말이 먹는 건초 1회분이었다는 말까지 있었다. 성도 예루살렘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가 되어 소멸했고, 그 땅에 유대인이 발을 디디는 것은 사형으로 금지되었다. 다만 기원 4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일 년에 한 번 압월Av 9일(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날이자, 135년 베르타가 함락된 날)에만 구 신전의 벽에 기대 기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예루살렘의 이른바 ‘통곡의 벽’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노시스주의란 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기원 1세기,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 속주의 피정복민(유대·사마리아, 이집트 등) 사이에서, 종교사적으로는 유대교의 외곽 내지는 그것과 접촉하는 지대에서 성립한 종교 사조이고, 다음과 같은 기본적 구성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하나는, 인간의 본래적 자기와 지고자(至高者)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하는 ‘인식’(그리스어로 ‘그노시스’라고 한다)을 구제(救濟)의 원리로 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체, 세계, 별자리, 우주의 창조자(‘데미우르고스’라고 한다) 일체를 비본래적인 악으로 간주하는 우주론적 이원론을 표방하는 것이다. 앞의 ‘지고자’란 이러한 전 우주 및 그 창조자도 부정적(否定的)으로 초월한 존재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러한 존재 양태와 구제 인식의 성립(지고자로부터 보내진 계시자(啓示者)의 중개에 의해)을 표현하는 초역사적 신화를 옹호한다는 것이다. 이 신화는 기성의 종교, 민족 신화를 환골탈태시킨 것에서 성립한다. 이러한 그노시스주의는 그리스도교와 관계없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리스도교 안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유대교 예수파' 운동은, 당연한 얘기지만 나사렛 예수부터 시작된다('나사렛 예수'란 갈릴래아 지방의 나사렛 마을 출신의 예수라는 의미지만,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와 구별해서, 역사상의 인물 예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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