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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7413141
· 쪽수 : 254쪽
· 출판일 : 2017-02-07
책 소개
목차
제1부 멋진 놈, 굿바이
클림트의 ‘키스’ 앞에서 | 떨림의 눈빛 | 멋진 놈, 굿바이
서점 가는 날 | 죽여주는 여자 | 소주 반 병과
커피의 사생활 | 흐린 하늘 | 그의 ‘부끄러움’과 만나다
제2부 개망초꽃
지중해의 여름 | 개망초꽃 | 오렌지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향기가 있는 언덕, ‘허브힐’ | 9월의 노래 | 갈림길
은행나무의 가을 | 제라늄 | 코스모스의 작별
제3부 호일당 방문기
배웅 | 얼음꽃 | 향기 없는 질투
호일당好日堂 방문기 | 그는 어디로 갔을까 | 고양이가 왔다
봄 선물 | 나르시스의 미소 | 언제나 5월
제4부 미련한 완주
화방사우花房四友 | 노을 | 미련한 완주 | 혼자 사는 즐거움
오래된 신발 | 내가 좋아하는 이름 | 마흔아홉의 일기
내가 누군지 알아요? | 우리가 사는 방식 | 반 평의 자유
제5부 유리문 안에서
그 여자, 재스민 | 오리 선생 | 슬픈 목요일
유리문 안에서 | 민들레 그녀 | 그녀가 토라졌다
악몽이 사라지는 법 | 완벽한 행복을 꿈꾸는 법 | 해피트리
해설 | 노을빛 고독의 문학성과 철학성 · 김우종
저자소개
책속에서
안탈리아 해변은 잔돌이 어여쁘다. 색색의 무늬가 박힌 납작하고도 뭉뚝한 돌들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타우루스 산맥으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 굴러 내려왔을까. 어쩌면 어느 여신들의 장신구가 풀어져 바닷물에 씻기고 파도에 닳아 이리도 고운 빛깔을 낸 것이 아닐까. 나는 신발을 구겨 가방에 넣고 돌을 줍기 시작한다. 주머니가 금세 불룩해진다.
넉넉한 햇빛과 마법의 바람, 신화 속의 보석과도 같은 돌이 있는 지중해의 여름바다와 마주하기 전에 나는 얼마나 많은 주저를 끌어안고 있어야만 했던가. 생업을 뒤로 하고 무턱대고 떠날 수 있는 용기는 애초에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 생의 에너지를 얻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거기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부추겼다.
‘가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열망은 삶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카뮈가 말했던가. 그의 한마디가 내 마음에 불을 지폈는지도 모른다. 지중해 바다에 앉아 삶의 무늬를 쓰다듬으며 그동안의 삶을 확인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보따리를 꾸릴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몇 년 전 지중해의 그곳은 아니었지만 처음 갔던 그곳을 눈에 아른거리게 했다.
남은 맥주를 한꺼번에 목뒤로 넘긴다. 알싸하고도 시원한 맛이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내게 여름은 늘 뜬구름과도 같아서 어쩐 일인지 한 번도 열정을 쏟은 기억이 없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려 애썼을 뿐, 혹독한 겨울 한가운데에 멈춘 채로 여름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삶에 대한 배신행위를 벗어나기 위한 어떤 모험도 그동안 나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작디작은 변화조차 두려워하면서 안일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엔 굳은 결심으로 길을 나섰고 지금의 나는 지중해의 여름과 하나가 된 듯하다. 가끔 몸과 마음이 절정에 이를 수 있도록 뜨거워지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한 번도 일탈을 해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그 일은 필연적 경험이 되고 말 테니까.
알싸한 취기에 젖어 나는 강렬한 태양 아래 천천히 몸을 눕힌다. 타우루스 산맥은 만년설의 흰 띠로 내 옆에 와 나란히 눕는다.
이 고요, 시간은 내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지중해의 여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