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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8502080
· 쪽수 : 391쪽
· 출판일 : 2018-06-08
책 소개
목차
다시 만나는 옛이야기 5
벙어리 이야기꾼 11
어흥! 37
복은 빌릴 수도 있지 65
흰 눈썹 휘날리며 109
도깨비 놀기 좋은 날 163
주먹이냐 반쪽이냐 191
내 복에 살지요 217
다시는 활을 쏘지 않으리 247
불어라, 회오리 277
우리 가문의 복덩이 303
씨름이 끝난 뒤 337
작가노트: 옛이야기 다시 만나기 365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는 벙어리입니다. 아니, 벙어리였습니다.
벙어리라면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제 제가 해보려는 이야기는 벙어리가 입이 열린 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벙어리였던 제가 입이 열려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더라 이 말씀입니다.
벙어리가 입이 열려 이야기를 하겠다니! 무슨 거짓부렁이냐! 뭐 이런 소리가 벌써 들려오는 듯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 테지만, 저는 분명히 벙어리였습니다. 우리 도련님, 우리 서방님이 초례를 치르러 사흘 전 이 마을로 왔을 때 저는 벙어리였습니다. 벙어리를 우리 마을에서는 뻘찌라고 합지요. 이 마을에서는 버버리라고 하더군요. 사흘 전 새벽같이 청석골을 나서 이곳 안평골에 당도한 것은 해가 중천에서 기운 지도 이슥한 때였습니다.
그때 제가 벙어리라는 사실은 다 알려져버렸습니다. 우리 서방님과 함께 신부 집이 어딘지 알아보는 잠깐 사이에 말입니다. 뭐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돌아서면서 바로 버버리네 어쩌네 하며 쑤군대는 소리는 썩 듣기 좋지는 않더군요.
쑤군댔던 사람이 이 자리에도 분명히 와 있을 터. 물어들 보세요. 제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여전히 무슨 흰소리냐는 분들 계신 듯해 해두는 소리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때까지도 벙어리였습니다.
벙어리였던 놈이 어찌해 말문이 열렸느냐 하면, 그건 신부 집 한 상 잘 차려놓은 맛난 음식 때문이냐, 아니면 용궁 같은 데서 구해온 무슨 신기한 약 때문이냐 하면, 그건 아니고, 아니고요. 하하.
이제 제 이야기가 어찌 되려나 하고, 좀은 궁금해들 하는 표정이십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봅지요.
-<벙어리 이야기꾼>
목숨 구했으면 된 건데 말이야. 머슴은 옳다구나 하며 또 말했지.
똥구멍에 담뱃대 걸어 호랑이 뱃속에서 빠져나온 일이 터무니없다 싶은 생각의 불씨를 번개처럼 일으켰나 봐. 호랑이굴에 물려갔다가도 동삼까지 얻어 살아 돌아올 수 있었으니 뱃심까지도 어지간히 든든해졌나 봐. 그랬나 봐.
“산속에 살면서 힘든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그러자, 호랑이가 몸을 돌려. 그리고 멈춰 선 채 머슴을 멍하니 쳐다보는 거야. 머슴은 외쳤어.
“제가 도울 일 있으면 도울 테니 말씀을 하십시오!”
산과 마을에 따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생각했는데, 도울 일이 있다면 돕겠다는 것 아니겠어? 순간 호랑이 가슴은 다시 뜨거워졌겠지. 눈물이 흐르는 걸 참고 호랑이는 동생을 지켜봤지. 눈빛으론 나도 너를 도울 수 있다면 도우마 하는 마음을 전하며…….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일까. 호랑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니까.
“너는 힘든 일 없느냐?”
그때 호랑이가 그렇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니까.
“…….”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도우마.”
호랑이는 사람의 말을 알아들은 것만 아니라, 그 순간 사람 말을 할 수도 있었던 거지. 둘 다 깜짝 놀랐어. 머슴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어.
“딱 하나 도와주실 일이 있습니다. 주인 영감이 그동안 새경을 한 푼도 계산해주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간 장가도 못 갈 처지라니까요.”
“머슴살이가 쉽지 않다던데 새경까지 안 줘?”
“말도 마십시오, 제 처지. 형님은 그동안 새끼도 봤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아직 장가도 못 갔다니까요. 새경을 받지를 못 하니 나아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형님이 좀 도와주십시오. 주인집 부근까지 와 있다가 제가 신호를 보내면 뒷숲에서 어흥! 하고 한번 크게 울어나 주십시오. 아니면, 담장 너머 마당으로 한번 그 모습만 보여주셔도 좋겠습니다요.”
호랑이야 이미 감동해 아우를 도울 생각이었지. 그러니 청을 안 들어줄 리 없었지.
-<어흥>
차복이의 볼로는 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통곡이 솟구쳐 오르는 순간 차복이는 몸을 돌려 옥황상제의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 그리고는 울면서 사정하기 시작했어.
“상제님, 제발 제 소청을 좀 들어주십시오. 석숭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사옵니다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니 저 복, 저 복주머니를 좀 빌려준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석숭의 복을 빌려 쓰게 해 주십시오. 석숭이 태어나면 반드시 돌려주겠습니다. 나무 한 짐밖에 제 복이 없다는 걸 알게 되니 더 살아갈 힘마저 나지 않습니다. 저처럼 배운 것 없고 가난한 각시의 목숨까지 앗아가지는 마옵소서. 저희 부부 세끼 밥 먹기도 빠듯하지만, 아직 누구의 것을 훔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의 것을 훔쳐와 그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단 말씀이옵니다. 부디 얼마 동안이라도 저 주머니를 빌려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부디!”
터무니없는 청이었지. 들어주리라 생각하고 한 청도 아니었어. 통곡을 참다 보니 나오게 된 소리일 뿐이었어. 그런데 그 뜻밖의 청을 듣고 있는 옥황상제의 표정이 난감해지는 거야. 한동안의 무거운 침묵 뒤 상제의 입이 열렸어.
“듣고 보니 그도 그렇긴 하구나. 한동안 빌려주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겠느냐. 내 그리 하마.”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차복이보다 먼저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은 것은 신하였지. 지상의 인간이 하늘에 올라온 것만도 경악할 일인데 복주머니를 빌려준다니 어찌하시려는 것이냐고 막아 나섰지. 차복이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거듭 조아렸어.
“고맙습니다, 상제님.”
“하지만 때가 되면 복을 돌려주어야 해. 석숭이 일곱 살 되는 해를 넘기면 안 된다.”
이때서야 차복이는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어.
“명심하겠습니다.”
-<복은 빌릴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