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무라 도시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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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도쿄 아사쿠사의 부유한 미곡상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사토 도시. 당시 사토 집안은 영주나 영주를 모시는 무사들의 쌀을 관리하고 있었다. 사토 집안은 여성에게 가업을 물려주지 않는 관습 때문에 데릴사위를 맞아들였는데, 도시코의 어머니는 이를 거부하고, 다른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도시코 역시 자유분방한 성격을 물려받아 사회적 인습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했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부속 고등여학교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 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도쿄부립 제일고등여학교로 전학해 졸업한 뒤, 일본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업보다는 작가가 되는 것에 뜻을 두고, 당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고다 로한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후 다무라 도시코는 낡은 관습을 벗어나지 못한 고다 로한의 지도법과 스스로의 창작 능력에 의문을 품고, 스승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고다 로한의 문하생이자 선배였던 다무라 쇼교와 결혼했다. 소설이 팔리지 않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자, 다무라 쇼교는 도시코에게 소설을 써 돈을 벌도록 압박을 가했다. 남편의 강압 아래 쓴 「단념(あきらめ)」이 《오사카아사히신문》 현상공모에 1등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대표작 「서언(誓言)」, 「미라의 립스틱(木乃伊の口紅)」, 「태워 죽여줄게(炮烙の刑)」, 「그녀의 생활(彼女の生活)」, 「산길(山道)」, 「구기자 열매의 유혹(枸杞の実の誘惑)」 등을 발표하며 인기 작가로 자리잡았다.
다무라 쇼교와 헤어지고, 1918년 연인 스즈키 에쓰를 쫓아 캐나다로 건너가 밴쿠버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가 일본어로 발행하는 신문에 ‘도리노코(鳥の子)’라는 필명으로 시, 평론, 에세이 등을 발표했다.
1932년 잠시 일본에 귀국했던 스즈키 에쓰가 갑자기 사망하자, 다무라 도시코는 큰 충격에 빠졌다. 18년 만에 캐나다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지내다 지인의 남편과 불륜 관계인 것이 드러나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중국어로 된 여성 잡지 《여자의 목소리(女声)》를 창간해 여성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1945년 중국인 작가이자 친구인 도정손(陶晶孫)의 집에 머물다 인력거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뇌출혈로 쓰러졌고, 사흘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중국 여성들의 조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코는 계급과 성별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문학과 사회운동을 통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당시 여성으로선 드물게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들에서 활동하며 큰 영향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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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영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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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일본 헤이와나카지마平和中島 장학재단의 초청으로 일본 도쿄가쿠게이東京學藝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다무라 도시코田村俊子 작품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는 「한일 근대여성문학 비교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9년 현재, 신라대학교에서 국제지역학부 일어일본학전공 초빙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히구치 이치요 작품 선집>(공역), 김명순의 일본어 소설인 <인생행로난> 등이 있고, 주요 저서로는 <신석정 시선>(편저), <한일문화 연구의 새 지평1 한일문화의 상상력 : 안과 밖의 만남>(공저), <이병주 문학의 역사와 사회 인식>(공저), <비타민 한국어4>(공저)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남성 작가가 바라본 ‘신여성’의 한일 비교」, 「이병주 <관부연락선>에 나타난 시모노세키와 도쿄」, 「한일 근대 여성 문학에 나타난 ‘연애’ 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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