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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0406222
· 쪽수 : 100쪽
· 출판일 : 2025-02-05
책 소개
북방의 정서로 빚은 처절한 삶의 노래
오장환, 서정주와 함께 시단의 3대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이용악의 시에는 그 명성답게 본능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의 시에 담긴 시어와 심상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놀라운 조화라는 학술적 찬사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어 구사자라면 단번에 느낄 수 있는 직관적인 힘 그 자체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시집을 출간 목록의 하나로 고려하는 것은 출판사로선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욕심입니다. 그러나 막상 본격적으로 출간을 시도하고자 하면 현실적인 문제들에 자꾸 부딪쳤습니다.
출간을 해야 할 시점이 됐다는 판단은 유난히 격렬했던 2024년에 의해서였습니다. 지난 2024년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거대한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이 벌어진 해였습니다. 급격하게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사람들은 기쁨과 혼돈, 무력감과 슬픔, 고통과 불안을 번갈아 가며 느껴야 했습니다. 이용악의 시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그러한 거대한 사건 사고들은 자연스레 이용악의 고난했던 삶, 역사 앞에 선 개인으로서의 삶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월북 전 남긴 마지막 시집 『이용악집』의 충실한 구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만나 이뤄진 한국어 시문학의 정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뤄낸 이용악의 진보적인 문학적 성취가 한국어 시문학의 어떤 정점임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처절한 가난 속에서 쓰여진 그의 시들은 유민들의 고난한 삶을 압축된 시어들로 면밀하게, 그러면서도 감정적 울림을 주는 서사를 담아 그려내며 우리 문학계에서 독자적인 북방의 정서를 구축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생활고에 의한 소극적 친일 의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혹과는 또 다르게, 그는 어느 순간 절필을 하게 되고 이윽고 일제 경찰에 자신의 작품들을 빼앗긴 후 칩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수 년이 지나 해방이 이뤄지자 공산주의자로 적극적 활동을 시작한 그는 해방 정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의 와중에 월북을 한 그는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선전 시들을 발표하게 되고, 이는 과거에 쓴 시들의 성취와 비교되며 비판받기도 합니다.
이렇듯 그의 삶의 궤적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의 질곡과 연동되어 복잡하게 구불거립니다. 가난과 사회적 압제와 물질적 유혹과 사상적 지향점들이 섞인 그의 개인사와, 민중의 삶을 세심한 시적 미학으로 그린 그의 시들 사이에는 거칠고 복잡했던 시대의 격랑을 그대로 맞은 사람들의 서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역사의 폭력성, 그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인간의 취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하는 문학 예술의 아름다움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용악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김지하 시인은 그를 가리켜 "진짜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하며 "우리 민족의 서러움을 이토록 우아하게 담다니"라며 찬탄했을 것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던 인간 이용악
시대의 격랑 속에서 문학 예술의 정점에 도달하다
본서의 원전인 『이용악집』은 이용악이 월북하기 전 이남에 남긴 마지막 시집입니다. 1949년에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시인전집』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기획된 이 책은 이용악이 자신의 과거 시집들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들에 신작 시들을 덧붙여서 만든, 이용악이 직접 모은 자신의 시들의 모음집입니다. 이 책은 이후 단독으로 출간된 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아직 이념적으로 치우치기 전에 완성된 모더니즘-리얼리즘 시들의 정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토록 거친 시대에는 거친 역사와 부딪치며 살면서도 민중과 서정을 놓치지 않은 작가가 쓴 시집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전의 구성을 최대한 충실하게 살리는 방향성의 현대적 편집을 거쳐 출간하는 걸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용악의 시들은 거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혼자가 아님을, 그와 같은 역사의 궤적이 다시 반복될 수도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가 도달한 공통 정서와 서늘한 미학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강렬한 울림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차
편집장에게 드리는 편지
1
오월에의 노래
노한 눈들
2
우리의 거리
하나씩의 별
그리움
하늘만 곱구나
나라에 슬픔 있을 때
월계는 피어
흙
거리에서
3
북쪽
풀버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4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낡은 집
5
오랑캐꽃
꽃가루 속에
달 있는 제사
강가
두메산골 (1)
두메산골 (2)
두메산골 (3)
두메산골 (4)
전라도 가시내
6
벨로우니카에게
당신의 소년은
별 아래
막차 갈 때마다
등잔 밑
시골 사람의 노래
7
불
주검
집
구슬
슬픔 사람들끼리
다시 항구에 와서
열두 개의 층층계
밤이면 밤마다
노래 끝나면
벌판을 가는 것
항구에서
8
빗발 속에서
유정에게
용악과 용악의 예술에 대하여
이용악 연보
책속에서
이빨 자국 하얗게 홈 간 빨뿌리와 담뱃재 소복한 왜접시와 인젠 불살라도 좋은 몇 권의 책이 놓여 있는 거울 속에 너는 있어라
성미 어진 나의 친구는 고오고리를 좋아하는 소설가 몹시도 시장하고 눈은 내리던 밤 서로 웃으며 고오고리의 나라를 이야 기하면서 소시민 소시민이라고 써 놓은 얼룩진 벽에 벗어 버린 검은 모자와 귀걸이가 걸려 있는 거울 속에 너는 있어라
그리웠던 그리웠던 구름 속 푸른 하늘은 우리 것이라 그리웠던 그리웠던 메에데에의 노래는 우리 것이라
어느 동무들이 희망과 초조와 떨리는 손으로 주워 모은 활자들이냐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신문지 우에 독한 약봉지와 한 자루 칼이 놓여 있는 거울 속에 너는 있어라
-'오월에의 노래'
불빛 노을 함빡 갈앉은 눈이라 노한 노한 눈들이라
죄다 바서진 창으로 추위가 다가서는데 몇 번째인가 어찌하여 우리는 또 밀려 나가야 하는 우리의 회관에서
더러는 어디루 갔나 다시 황막한 벌판을 안고 숨어서 쳐다보는 푸르른 하늘이며 밤마다 별마다에 가슴 맥히어 차라리 울지도 못할 옳은 사람들 정녕 어디서 움트는 조국을 그리는 것일까
폭풍이여 일어서는 것 폭풍이여 폭풍이여 불길처럼 일어서는 것
구보랑 회남이랑 홍구랑 영석이랑 우리 그대들과 함께 정들인 낡은 걸상이며 책상을 둘러메고 지나간 데모에 휘날리던 깃발까지도 소중히 감아 들고 지금 저무는 서울 거리에 갈 곳 없이 나서련다
-'노한 눈들'
아버지도 어머니도
젊어서 한창땐
우라지오로 다니는 밀수꾼
눈보라에 숨어 국경을 넘나들 때
어머니의 등골에 파묻힌 나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젖먹이와 다름없이
얼마나 성가스런 짐짝이었을까
오늘도 행길을 동무들의 행렬이 지나는데
뒤이어 뒤를 이어 물결치는
어깨와 어깨에 빛 빛 찬란한데
여러 해 만에 서울로 떠나가는 이 아들이
길에서 요기할 호박떡을 빚으며
어머니는 얼어붙은 우라지오의 바다를
채쭉 쳐 달리는 이즈보스의 마차며 트로이카며
좋은 하늘 못 보고
타향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길 하시고
-'우리의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