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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바람 세트](/img_thumb2/978893297118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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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큰글자도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바람 세트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2971186
· 쪽수 : 952쪽
· 출판일 : 2023-04-03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2971186
· 쪽수 : 952쪽
· 출판일 : 2023-04-03
책 소개
다가오는 2023년,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가 출간 100주년을 맞이한다. 열린책들은 한국시사 100주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맞으며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을 출간한다.
목차
카프 시인집
현해탄
낡은 집
헌사
와사등
태양의 풍속
초롱불
육사 시집
오랑캐꽃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저자소개
김광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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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개성에서 태어나서 개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1939년 『와사등』을 시작으로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을 펴냈다. 자오선 동인으로도 활동했으며 1989년 지용문학상을 받았다. 1993년 부암동 자택에서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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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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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함경북도 학성군(후에 성진으로 편입됨) 학중면 임명동 275번지에서 부친 김병연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의 6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아명은 인손(寅孫), 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등단 초기 간간이 G. W.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
어린 시절 고향의 임명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한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다. 13세에 성진의 농학교(중등과정)에 진학하였으나 1년 수학 직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 다니게 된다. 보성 3학년 재학 도중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고향에 내려와 요양을 하게 되는데,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 학교로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 유학을 떠나 당시 도쿄 소재의 메이쿄(名敎)중학[현재는 도쿄 근처 지바(千葉) 현 우라야스(浦安) 시 소재의 도카이(東海)대학 부속 우라야스고교]에 편입, 졸업한다. 졸업 이후 1926년 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문학예술과로 진학하고 1930년 봄에 동 대학을 수료한다.
대학 재학 기간 중 서구 모더니즘의 여러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귀국과 더불어 ≪조선일보≫ 사회부,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 창작과 비평 발표 등의 문필 활동에도 힘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글은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인 1930년 4월 27일에서 5월 3일까지 발표한 <오후와 무명작가들?일기첩에서>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평론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한다면 문학적 감상을 섞은 단상 형태의 수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평론은 같은 해인 1930년 7월 24일에서 30일까지 ≪조선일보≫ 지상에 편석촌이라는 필명(호)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한 <시와 시인의 개념-근본적 의혹에 대하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그는 활발하게 서구 모더니즘에 영향을 입은 시작 활동과 비평 활동을 꾸준히 병행하면서 당대 문단의 중심을 향해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간다. 그런 와중에 1933년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 문인들의 친목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문학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다. 1935년은 그의 문단 활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다. 대표작이기도 한 장시 <기상도>를 잡지 ≪중앙≫과 ≪삼천리≫에 연재하는 한편, 그의 초기 모더니즘시론의 핵심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오전의 시론> 시리즈를 ≪조선일보≫ 지면에 장기간에 걸쳐 의욕적으로 연달아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스스로 모험을 감행한다.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학문 연구를 위해 재도일하여 도호쿠(東北)제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도호쿠제대 재학 기간 동안 조선 내 그의 문단 활동은 잠시 주춤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기도 하나, 이 기간 그는 영문학의 새로운 학문적 원리와 이론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문학관을 심화하는 한편, 보다 폭넓은 사회 역사적·철학적 토대 위에 종래 자신이 추구했던 모더니즘문학 운동의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1939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함과 함께 조선 문단 전면에 재등장한다. 복귀 후 한동안 문단 활동에 주력하지만, 1940년대로 넘어서자 점차 조여드는 일제의 압박에 회의와 위기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가 한동안 절필 상태로 지내게 된다. 친일 문학인들과 단체의 끈질긴 동참 권유를 뿌리치고 긴 침묵의 기간을 보낸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가족과 더불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간의 침묵을 만회라도 하듯 문단과 학계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발발된 직후 서울 거리에서 북한 기관원들에게 연행당한다. 그 뒤 북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내에서 그의 행적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뚜렷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 시론집으로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50)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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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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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7월 7일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에서 가난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배재고보에 입학한 박세영은 1학년 때부터 문우 송영과 함께 ≪새누리≫라는 문집을 발간하며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시작한다. 1922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입학하나 곧 중퇴한다. 같은 해 4월 중국 상해의 혜령 영문 전문학교에서 수학하며 남경, 천진, 만주 지역을 주유한다.
중국 유학 시절 박세영은 고보 동창생 송영이 간행하던 사회주의 문화 운동 단체 “염군사”의 기관지 ≪염군≫ 1호에 원고를 보내는 등 사회주의 문학 운동에 관심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 그가 머물던 곳들이 중국 사회주의 운동의 근거지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에 따라 이 시기는 시인 박세영의 본격적인 사회주의 문학 운동을 위한 예비적 기간으로 추정된다. 특히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이 무렵에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박세영의 시는 계급적 당파성을 띤 프로문학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 시기 그의 시들은, 식민지 조국을 떠나 이국에서 느끼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 경치에 대한 서글픔을 동반한 막연한 현실 인식이 주조를 이룬다. <양자강(揚子江)>, <강남(江南)의 봄>, <해빈(海濱)의 처녀(處女)>, <포구 소묘(浦口素描)> 등 중국 체험을 배경으로 쓰인 시편들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1924년에 귀국한 박세영은 송영, 이기영, 윤기정, 박영희, 이적효, 임화 등과 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문학 운동 단체인 조선프로예맹에 가담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는 임화, 박아지 등과 함께 카프의 아동문학 기관지 ≪별나라≫의 책임 편집을 맡는 등 프로문예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또한 1931년에는 김창술, 권환, 임화, 안막과 함께 합동 시집인 ≪카프 시인집≫을 간행하고, 이후 모교인 배재고보에 근무하기도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박세영은 카프의 비해소파로서 같은 해 12월에 조직된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다. 또한 이듬해에는 권환, 김용호, 박아지, 박석정, 안완순, 윤곤강, 이주홍, 이찬, 이합, 조벽암, 조영출과 함께 우리문화사에서 해방 기념 시집 ≪횃불≫(‘저자 대표’는 박세영으로 되어 있다)을 간행한다. 그러나 12인 공동 시집 ≪횃불≫ 간행을 전후한 이 무렵 그는 이른바 제1차 월북파로 월북한다. 월북 직후 그는 1946년 3월 25일에 결성된 북한 사회주의 문학 단체인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 가담한다. 아울러 1947년에는 북한의 애국가를 작사해 김일성의 극찬을 받기도 한다. 박세영이 작사한 <애국가>는 현재까지도 북한의 국가(國歌)로 불리고 있다.
1950년대 북한에서의 박세영은 시기별로 전개되는 북한의 문예 창작 방법론의 지침을 일정하게 따르면서, 한편으로는 당의 정책에 부응하는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창작한다. 가령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발표한 <쏘련 군대는 오는가>, <숲 속의 사수 임명식>, <나도 쓰딸린 거리를 건설한다> 등의 작품들과 김일성 우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항일 무장 투쟁사를 형상화한 서사시 <밀림의 역사>는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0년대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국평화통일위원, 북한최고인민회의대의원, 문예총중앙위원 등 북한 문예 조직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1989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 시단의 구심으로 활약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제까지 간행된 박세영의 시집은 1938년 별나라사에서 간행된 첫 시집 ≪산제비≫를 비롯해 ≪진리≫, ≪나팔수≫, ≪밀림의 역사≫, ≪승리의 나팔≫, ≪룡성시초≫, 여기에 ≪박세영 시선집≫을 더해 도합 7권 정도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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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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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충청북도 보은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중퇴하였다.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시와 동시 등을 발표하며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다. 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창작하였다. 1946년 임화, 김남천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월북하였고 1951년 신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성벽(城壁)』, 『헌사(獻辭)』, 『병(病)든 서울』, 『나 사는 곳』, 『붉은 깃발』, 『에세닌 시집(詩集)』과 「백석론(白石論)」, 「자아(自我)의 형벌(刑罰)」 등의 다수의 평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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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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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폐교 조치되자,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연길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그 외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도 시를 발표하였으며,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대학 시절 틈틈이 쓴 시 19편을 골라 시집을 발간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신변을 염려한 스승과 벗들의 만류로 뜻을 보류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을 모의한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고향 용정에 묻혔다. 일제의 생체 실험 주사에 따른 희생으로 추정될 뿐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1948년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 내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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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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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이가호와 허길 사이에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그의 형제 중 다섯째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월북 이후 1950년대 초 숙청당한 이원조다. 어릴 때 조부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19년에 신학문을 접한 보문의숙을 졸업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대학 상과에 입학해 7개월간 다녔다.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었다. 일본 경찰이 장진홍이란 인물은 물론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진범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육사를 비롯해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가 함께 검거되었다. 원기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미결수 상태로 1년 반을 넘겼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 1월 3일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1935년 정인보 댁에서 시인 신석초를 만나 친교를 나눴다. 같은 해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茶山文集)≫ 간행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했다.
1940년 4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퉁(東廠胡同) 1호에서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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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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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다. 임화는 필명이다. 1908년 10월 13일, 서울 종로의 낙산 아래에 위치한 보통 가정에서 태어난다. 1926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는 한편, 카프(KAPF)에 가입해 이후 우리나라 프롤레타리아문학 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1927년에는 ‘임화’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다이즘 성격의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카프에 몸을 담기 시작한 이래 일관되게 계급주의문학을 추구해 나갔다. 이듬해인 1928년에는 박영희의 지도를 받으며 김기진, 송영, 김영팔, 최서해, 최승일, 박팔양, 이기영, 안석영 등 카프 맹원들과 친교를 맺고 프로문학 운동에 더욱 깊숙이 관여한다.
1929년에 박영희의 도움으로 동경으로 가서 김남천, 안막 등을 만나 훗날 카프를 장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이른바 제3전선파로 불리는 일본 유학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카프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바로 이 시기, 도일을 전후해 단편 서사시 양식을 개척한다. 또한 이즈음에 김기진과 박영희의 이른바 내용·형식 논쟁이 일어나는데, 임화는 박영희의 편에 서서 김기진을 기회주의적 개량형 활동가라고 비판한다. 이 무렵 영화에도 관심을 보여 <유랑>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한편 <혼가>를 직접 제작하여 개봉하기도 한다.
1931년, 동경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안막, 김남천, 권환 등과 손잡고 카프의 구세대 인물들을 일선에서 후퇴시키고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1931년에 벌어진 일제의 카프 맹원들에 대한 제1차 검거 사건에서 박영희와 함께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이듬해에 김남천 등과 함께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을 주도한 후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 자리에 오른다. 1934년에는 박영희의 전향 선언이 나오고 세칭 신건설사 사건(전주 사건)으로 불리는 카프 제2차 검거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에 카프 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폐병으로 투옥을 면한다. 그러나 조직 내외의 여건이 악화되자 임화는 1935년에 카프 해소파들과 함께 카프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1936년 이후 정세 악화로 문학을 통한 정치적 투쟁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자, 문학의 정치적·현실적인 문제보다는 그 본질 문제나 문학사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1938년에 이르러 첫 시집 ≪현해탄(玄海灘)≫을 발간하는데, 이 시집은 계급주의 이념과 서정성이 절실하게 조화를 이룬 수준 높은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 이듬해에는 ≪개설 신문학사≫를 집필하고 1940년에는 일제 치하에서 가장 방대하고 수준 높은 평론집인 ≪문학의 논리≫를 발간하는 한편, 1944년에는 ≪조선 영화 연감≫과 ≪조선 영화 발달사≫ 등 영화 관련 저서를 집필하기도 한다.
광복이 되자 임화는 이원조,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하고 그 중심인물이 된다. 1946년에는 위조지폐 사건인 이른바 ‘정판사 사건’이 터지면서 미군정의 남로당 탄압이 적극화되는데, 이 어려운 때에 임화는 남로당 외곽 단체인 ‘민전(民戰)’의 기획 차장을 맡아 남로당 문화 담당 최고 이론가로 활동한다. 그런 와중에도 1947년에는 제2시집 ≪찬가(讚歌)≫와 시선집 ≪회상시집(回想詩集)≫을 발간해 문학 활동을 꾸준히 전개한다. 미군정의 남로당원 탄압이 심해지자 끝내 월북해 황해도 해주로 이동한다.
1948년 이후 박헌영이 있는 평양으로 가서 그를 지지하는 문학 노선을 견지하면서 ‘조선문화예술총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을 따라 서울로 돌아와 잠시 머문 뒤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간다. 이때의 전선 체험은 1951년에 발간한 네 번째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에 생생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이듬해에 관제 비평가 엄호석 등에 의해 이 시집의 시편들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정치적 비판을 받는다.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부에서 미제의 고정간첩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지은 책으로 시집 <현해탄>, <찬가>, <회상 시집>, 평론집 <문학의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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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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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에서 태어났다. 1932년에 도일하였고 1935년 3월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신인문학』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37년 도쿄 산분샤三文社에서 첫 시집 『분수령』을 발표하고 1938년에 두 번째 시집 『낡은 집』을 같은 출판사에서 펴냈다. 1939년에 귀국하여 다수의 잡지, 언론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1943년에 모종의 사건으로 칩거에 들어갔다. 해방 후 1947년 아문각에서 『오랑캐꽃』, 1949년 동지사에서 『이용악집』을 발간했다. 1950년에 '남로당 서울시 문련 예술과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의 서울 점령에 의해 풀려나 월북한다. 1955년에 민주청년사에서 산문집 『보람찬 청춘』을, 1957년에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리용악 시선집』을 발간했다. 1963년에는 공역으로 『풍요선집』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에서 발표했다. 1971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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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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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전주에서 태어나 노동을 하면서 독학을 하였고 1950년에 사망하였다. 1924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프로 문학 운동이 아직 활발하지 않았던 1920년대 중반에 비교적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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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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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안필승(安弼承)이며, 안막(安漠)과 추백(萩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28년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에 입학했지만 다시 도쿄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노문과에 입학했고 1935년에 졸업했다. 일본 유학 시절 계급 사상에 심취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동맹원으로 프로문학 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대 말에는 조선에 귀국하여 카프를 볼셰비키화로 재조직하는 제2차 카프 방향 전환을 주도했다. 이후 카프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조선지광≫ 1930년 3월 호에 발표한 첫 평론 <프로 예술의 형식 문제 - 푸로레타리아 리아리슴의 길로>를 필두로 <맑스주의 예술비평의 기준>, <조직과 문학>, <조선 프로 예술가의 당면의 긴급한 임무>까지 1930년 한 해에 발표한 평론들은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을 미학 이론으로 한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이론적으로 주장하는 글이었다.
카프 조직에 깊이 관여했던 안막은 1931년 9월 카프 제1차 검거 때 체포되었다가 1932년 1월에 불기소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일제 말기까지 별다른 문학적 행보 없이 최승희의 무용 활동에 동행했다. 해방 직후 월북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문화선전성 부상, 작가동맹 중앙상무위원에 오르는 등 문화 예술 분야의 요직을 맡았지만, 1958년 반당 종파분자로 체포된 후 연안파 숙청에 연루되어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확한 사망 연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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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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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5월 3일 평안남도 평양시 진향리에서 태어났다. 평양의 숭실상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의 중앙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 그는 희곡 창작에 뜻을 두었으나 곧바로 시 창작으로 돌아서서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갔다. 1939년 10월 ≪문장≫에 시 <심야>, <마을>이 정지용의 추천으로 게재된 후 1940년 1월까지 <마을>, <주막>, <초롱불>, <밤길>, <거리> 등을 연속적으로 발표하면서 등단의 과정을 거쳤다. 그는 등단 이전에도 <삶의 오료(梧了)>(≪조선중앙일보≫, 1932), <여수>(≪시건설≫, 1935), <제비>(≪조선문학≫, 1936), <행복>(≪맥≫, 1938) 등의 작품을 발표한 경력이 있다. 그의 실질적인 창작 활동은 정식 등단보다 몇 해 앞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40년에 박남수는 첫 시집 ≪초롱불≫을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일본 중앙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첫 시집에는 모더니즘적 기법에 기반을 두고 감각적 이미지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시가 많은 편이다. 1945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진남포지점에 입사해 평양지점장을 맡는 등 직장 생활에 충실하기도 했지만,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한 이후로는 직장 생활보다는 집필 활동에 많은 비중을 두고 살아가게 된다. 1952년에는 현수(玄秀)라는 이름으로 ≪적치 6년의 북한문단≫을 간행하고, 1954년에는 문예지 ≪문학예술≫을 주재하면서 문단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 나갔다. 또한 1957년에는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등과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 제5회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첫 시집 간행 후 18년이 지난 1958년에 이르러서 제2시집 ≪갈매기 소묘(素描)≫를 간행했는데, 이 시집의 시편들은 이전의 이미지즘의 경향을 유지하면서도 삶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드러내는 특성을 보여 준다. 이후 1964년에는 제3시집 ≪신(神)의 쓰레기≫를 간행하는 한편,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불안정한 시간강사 신분으로 불규칙한 집필 활동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도 그는 1970년에는 제4시집 ≪새의 암장(暗葬)≫을 발간하고, 1975년에는 장편서사시 <단 한 번 세웠던 무지개-살수대첩>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실천해 나갔다.
1975년에는 이미 이민을 가서 미국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찾아 고국을 떠나게 된다. 이 시기에 박남수 시인은 플로리다, 뉴욕, 뉴저지 등지에서 과일 장사를 하는 등 생활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했다고 전해진다. 자연히 시 창작과는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정착한 후 6년이 지난 1981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제5시집 ≪사슴의 관(冠)≫을 발간했다. 이후 다시 10여 년간의 침묵 생활을 거친 뒤 1992년이 되어서 제6시집 ≪서쪽, 그 실은 동쪽≫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이즈음에 박남수 시인은 아주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다. 그 결과 1993년에는 제7시집 ≪그리고 그 이후≫를 발간했으며, 이듬해에는 다시 제8시집 ≪소로(小路)≫를 발간하고 ‘공초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8시집을 간행하던 그 해에 박남수 시인은 숙환으로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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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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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권경완(權景完)이며, 1903년 2월에 경남 진주부 진해군 서면 오서리(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경행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중동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도일하여 야마가타(山形)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24년에 단편소설 「아즈매의 사(死)」가 『조선문단』현상공모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 후 소년소설,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1929년에 교토제대를 졸업한 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에 가입하였고, 카프 도쿄지부와 무산자사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와 프로문학 작품을 발표하고 프로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 공동시집 『카프시인집』을, 1933년에 공동소설집 『농민소설집』을 출간하였다. 1931년, 1934년 두 차례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는 동안 폐결핵으로 고생하였다. 1935년에 석방된 후 낙향하여 김해의 하자마(迫間) 농장에서 일하였다. 1939년에 재차 상경하여 문학에 매진하였다. 1943년에 첫 단독시집 『자화상』을, 1944년에 두 번째 시집 『윤리』를 출간하였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서기장을 비롯해 여러 직책을 맡았으나, 폐결핵의 악화로 활동하지 못하였다. 1946년에 시선집 『동결』을 출간하였다. 1947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좌익세력 검거의 와중에 귀향하여 경남 마산에 머물렀다. 가난과 병마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1954년 7월에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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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현실을 메스대 위에 던져라
--- 「오월의 훈기(薰氣), 카프 시인집」 중에
한 방울 눈물 속엔
일찍이 네가 알고 보지 못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자라난 요람의 옛 노래가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뜯던 봄나물과 꽃의 맑은 향기가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꿈꾸던 청춘의 공상이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갈아 부친 땅의 흙내가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어루만지던 푸른 보리밭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안아 보던 누른 볏단이 있다.
--- 「눈물의 해협, 현해탄」 중에서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냄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 「낡은 집, 낡은 집」 중에서